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그믐인가 봅니다.
그믐에는 달이 깊은 잠에 빠져 도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름밤의 그믐은 칠 흙같이 어둡지는 않습니다.
안산(1 安山)의 능선이 희끄무레하게 윤곽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말 타기하며 놀았던 커다란 소나무도 어림짐작으로 윤곽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반딧불이가 수도 없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다닙니다.
가만히 그들의 향연을 보노라니 어지럼증이 날 것 같습니다.
어떤 녀석은 신호등처럼 깜박이며 날고 있습니다.
풀 섶에서 깜박이는 반딧불을 자세히 보니 풀잎을 부여잡고
나 같은 건 관심도 없다는 듯 아랫배에서 푸른 불빛을 토해냅니다.
돌담위의 용마람(2)을 기어가는 호박넝쿨의 넓은 잎들이 우산을 씌워 놓은 듯
담벼락을 붙들고 실랑이를 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불가사리처럼 커다랗게 입을 벌렸던 노란 꽃들이 입을 꼭 다물고 있습니다.
키 작은 우리는 훌쩍 뛰어 호박꽃을 하나씩 꺾어 들었습니다.
반딧불이를 잡아 호박꽃 초롱을 만들어 들고 서로 내 것이 밝다고 우기며
고구마 밭 가운데 누워있는 넓은 돌 위로 올라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돌을 고인돌이라고들 합니다.
밭 주변에 빙 둘러 심어진 옥수수가 마치 울타리 같습니다.
빗금을 쳐대는 반딧불이의 향연을 보노라니 그들이 정말 멋진 신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구요?
그들의 사랑놀이가 버얼건 대낮에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시끄럽지 않기 때문이죠.
그 녀석들의 일생을 잔인한 정복자라고들 얘기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여간 멋진 신사가 아닙니다.
그들은 어릴 적 다슬기를 먹이로 삼아 몸속으로 파고들지만 성충이 되어 이듬해 여름
부화한 후에는 더 이상 잔인한 죄를 짓지 않고 이슬만 먹고 살기 때문이죠.
기껏 15일을 살면서 불빛으로 아름다운 밀어를 속삭인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너! 나 사랑해? 반짝!”
“응 그래 사랑해! 반짝!”
장애인들이 수화를 하는 모습과 그들의 대화가 어쩌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부분의 곤충이 날개가 부서지도록 비벼대며 짝을 구하는 것에 비하면
은밀한 대화로 사랑을 나누는 마술사 들입니다.
춘식이의 눈썹에 붙은 반딧불이의 빛이 점점 식어갑니다.
모기떼들이 귓전에서 윙윙대고 반바지 밑을 공격합니다.
“어험!”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이 늦은 시간에 오순이 아버님이 헛기침을 하시며
삽을 메고 논에서 돌아오십니다.
오늘 김맨다고 하더니 뒤치다꺼리가 남았던 모양입니다.
1) 안산 : 보통 마을의 조그마한 앞산을 안산이라 부름
2) 용마람 : 초가의 지붕이나 돌담을 덮는 'ㅅ'자 형의 이엉으로 용마름이 표준말
** 반딧불이는 맑은 개울에 서식하는 다슬기를 중간숙주로 하여 자라나고 이듬해 부화하여 밤하늘을 수놓는 발광 벌레이다. 지금은 환경오염으로 인해 반딧불이가 서식할 곳이 없어져 찾아보기 힘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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