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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24. 보건체조

 

‘삼식아!~’ 

이른 새벽 사립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항상 마을 어귀 당산나무 밑에서 만나 보건체조를 가는데 오늘은 꽃잠이 들었습니다.

벌떡 일어나 툇마루에 서니 백구 녀석이 킁킁 코를 불며 먼저 반깁니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걸어 학교로 향했습니다.

백구 녀석이 개울까지 따라 오다말고 단념을 하더니 뒷발을 들고는

오줌을 칙 갈기고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개울물 소리가 더욱 맑게 들립니다.

우리들은 쭈그리고 앉아 세수를 하기 시작 했습니다.

말이 세수이지 실은 코 잔등에 물 한번 묻히는 정도 입니다.

개울물 한편에는 가늘고 고운 모래가 물에 씻겨 모래톱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는 모레를 한 움큼씩 퍼서 이를 닦기 시작 했습니다.

소금으로 닦는 것 보다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입안이 개완(개운)합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멀리 학교의 확성기에서 행진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방학 동안에 보건체조를 하러 가야 합니다.

그리고 출석 확인표에 도장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 도장이 차곡차곡 찍혀 나가는 것을 보면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보건체조 담당 선생님은 학교일을 도와주시는 보조 선생님이신데

독하기로 소문 나있습니다.

우리는 그 선생님 앞에만 가면 오금이 저려 대답도 큰소리로 못합니다.

항상 코를 쥐거나 귀 옆의 머리를 잡아 올려 눈물이 핑 돌게 하는

이상한 취미를 갖고 계신 그 선생님이 무서워서라도 보건체조를 빠질 수 없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우리는 밭둑길을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이슬이 잔뜩 내려 고무신 속에서 자박 자박 소리가 납니다.

이미 운동장에는 양팔 간격으로 벌린 애들이 가득 찼습니다.

‘핫 둘 셋 넷....    둘 둘 셋 넷...“

배경 음악에 섞여 나오는 구령 소리에 맞춰 체조를 합니다.

등배운동을 하며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이

마치 뻥 뚫려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숨쉬기 운동이 끝나고 구령대 앞에 서자 근엄하게 도장을 찍던 선생님이

우리가 늦게 온 것을 잊어버리지도 않으시고 또다시 코를 쥐어 비틉니다.

눈물이 찔끔 나오고 선생님의 손에도 콧물이 묻습니다.

속으로 잘 됐다 싶어 춘식이를 쳐다보니 춘식이도 나와 같은 생각인 듯 합니다.

또 한 칸을 채워주는 붉은색 도장이 앞산에서 꾸물대는 아침 해와 닮았습니다.


식전 아침의 배고픈 밭둑길을 걷자니 앞서가던 춘식이 녀석이 잽싸게 오이를 따와

툭 분질러 절반을 줍니다.

우리는 그 밭이 누구네 밭인지 잘 압니다.

가슴이 두근거려 주위를 둘러 봤지만 우리들 밖에 없습니다.

이런 꼭두새벽에 보는 사람은 없지만 왜 이리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른 한입 베어 물고는 입을 오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달콤한 오이 맛이 새벽녘의 안개와 함께 코끝에서 하늘로 번져 나갑니다.


** 보건체조는 조선시대 이황의 실내 의료체조(활인심방)에서 시작되어 해방 전까지는 군사훈련수단으로 이용되고 해방 후인 1940년 제 30회 전국체육대회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 후 1953 12월 30일 김영일(金英一)의 지도로 서울시 공관에서 신제(新制) 국민보건체조의 발표회를 가짐으로써 HLKA를 통한 라디오 체조방송이 시작되면서 각급 학교를 통하여 보급되었다. 그 후 체조 음악에 구령을 넣어 것은 경희대 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유근림씨로 국민체조의 동작을 직접 고안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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