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

지리산은 회의를 하고 있더라

 

                                        (멀리보이는 왼쪽이 천황봉 오른쪽이 촛대봉)

 난 지리산을 항상 전라도 산으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세 개 도를 품에 안고 있건만 전라도 산이기를 고집한 때문이다.

그 지리산을 여태껏 가본 적이 없으니 지리산을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라 무박산행을 따라나섰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거처 임걸령을 들렀다가 피아골로 내려오는 코스다.

성삼재가 1,000고지이고 노고단이 1,500고지이니 불과 500고지를 오르는

어찌 보면 간단한 산행이란다.


해오름을 볼 욕심으로 2시에 일어나 눈을 비비며 광주를 출발했다.

모두들 잠든 시간에 청승맞게 요란을 떠는 나는 산악인도 아닌 것이

겉멋만 들은 건 아닌가 싶다.

난 원래 선잠을 깨면서까지 무박산행은 물론 어떠한 놀이든 싫어한다.


언젠가 추운 겨울 밤 태백산을 따라갔다가 앞사람 발꿈치와 어른거리는

손전등 불빛만을 담고 내려온 기억 때문이다.

사실 원거리 산행을 위해 어쩔 수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날 태백산에서

해오름은커녕 남쪽으로만 가지가 뻗은 주목나무만 보다 내려오고 말았다.


이번 산행도 무박이라 내키지 않았지만 따라 나선 것은 지리산을 보지 않고

지리산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라면 인민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온몸을 던져 누볐던

빨치산들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직 8월이 끝나지 않은 지리산의 새벽바람은 벌써 초겨울바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성삼재 휴게소에 이르자 관광버스들이 토해놓은 등산객들은 한결같이

결전을 치루기 위해 준비하는 선수들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산행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직 일행이 도착하지 않아 행장을 꾸리는 그들의 모습을 기웃거리다말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니 보석처럼 박힌 수많은 별들이 바로

내 머리위에 내려와 있다.

그러고 보니 밤하늘을 본 기억이 까마득하다.

어릴 적 여름밤 평상에 누워 보았던 그 밤하늘이 이곳 지리산에 있었다.


우주는 과연 어떻게 생겼기에 저 많은 별들을 보듬고 있을까?

왜 저 별들은 떨어지지 않고 떠있는 것일까?

조물주의 변화무쌍한 재주에 경외감을 느끼며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매 순간들이 대단한 듯싶었지만 티끌만치도 못하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내게도 꿈을 키우던 밤하늘이 있었건만 잊고 지낸지가 수 십 년이다.
저 별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빛깔로 자신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인생사 또한 우주의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어둠을 더듬어 노고단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휴대전등이 춤을 추며

무리지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휴대전등을 준비하지 못한 나는 염치를 팽개치고 불빛을 빌리려

무리 속에 끼어들었다.

마치 전철에서 신문을 훔쳐보듯 불빛을 훔쳐 걷건만 그들은 탓하지 않는다.

혹시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처럼 무임승차한 적은 없었을까?


“아 그래 뭐 허니라고 인제 온당가?”

노고단에 이르자 야속하게 눈을 흘기면서도 지리산이 반가이 맞는다.

해오름을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마당에서 놀고 있던

초롱초롱한 별들은 잠자리에 들었는지 자취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우주의 왕인 태양이 나타난다니 그들은 서둘러 도망간 것이 아닐까?

멀리 천황봉과 촛대봉 사이로 구름인 듯 운해인 듯 붉게 물든 놀이

훼방을 놓을까 싶어 가슴 졸이며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이날 이때까지 내 눈으로 직접 해오름을 본적은 없었다.

물론 일부러 해오름을 찾아 나서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휴가 때 동해안을

찾아도 나와는 운대가 맞지 않은지 야속한 태양은 숨바꼭질을 걸어왔다.


“와! 일출이다”

초조하게 기다리는 순간 잘 익은 복숭아처럼 볼을 붉히던 태양이

금새 이글거리며 불쑥불쑥 솟아오르더니 장엄한 모습으로 우주는 물론

인간세상을 호령하기 시작한다.

아! 한낮의 태양은 거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로구나.

밤사이 죽은 듯 깊은 잠을 자던 그가 천하를 호령하는 왕 중의 왕으로

발현하는 것은 미물인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없을 만큼 고뇌를 간직하고

있다가 뿜어내는 열정이리라.


빨치산들도 이런 해오름을 보며 혁명의 꿈을 키워갔을 것이다.

돼지령을 거쳐 임걸령으로 향하는 우리들처럼 그 옛날의 빨치산들도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을 참으며 걸었으리라.

가진 자들의 횡포에 맞서 항쟁하던 동학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어쩔 수없이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소작인들의 아픈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친일 반민족주의자들을 처단하지 못하자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조차

인민혁명대열에 서고 말았던 그들의 고뇌와 육신의 고통이 통곡이 되어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임걸령에서 바라본 지리산은 산들이 회의하러 모인 듯 사방을 둘러봐도

산 천지다.

천황봉이 회의를 소집하자 모두들 부산하게 모여들어 하명을 기다리는

모양새다.

막걸리 한잔에 아침으로 김밥을 먹고 피아골로 하산 길을 잡았다.

직전마을까지 무려 7Km가 넘는 가파른 피아골 계곡은 나의 인내를

시험하기 시작한다.

이 계곡 어딘가에 트를 틀고 저항했을 빨치산들은 너무 빨리 찾아오는

겨울을 얼마나 한탄했을까?


“이 코스는 지리산에 발을 담그는 정도밖에 안되는 간단한 코스예요”

누군가의 말에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발을 담그는 게

이 정도인데 무릎을 담그면 얼마나 힘들까?

“근데 피아골이 뭔 뜻이여?”

6.25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핏빗 계곡을 이루었다는 말이 맞을까?

그러고 보면 6.25 이전부터 피아골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으니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리저리 뒤져보니 ‘비아골’이 격음화 되어 피아골이 되었다는 말이

일리가 있는 듯싶다.

‘비’ 나 ‘빗’이 비탈을 의미한다니 비탈진 산새를 본 따 피아골이 되었단다.


길고 긴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곳곳이 소(沼)를 이루며 힘차게 물줄기를

뿜어낸다.

물방울 하나는 힘이 없지만 모인 물은 힘을 실었더라.

우리 인간들도 혼자는 약하지만 조직의 힘은 강하다는 걸 일깨워준다.

삼홍소(三紅沼)에 이르니 조선 중종 때의 조식이 읊었다던 싯귀와 함께

沼가 나를 반긴다.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山)꽃을 꾸몄으니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마저 붉어라.


산의 단풍이 붉고 소에 비친 물빛이 붉고 얼굴 또한 붉다는 데

아직 여름의 끝자락에 매달린 피아골이 단풍을 몰라 하니

가슴 한 곳이 허전하다.

비록 천황봉까지 종주하지 못했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버리고

산과 함께 호흡한 산우 모두가 승자였다.

080830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별여행  (0) 2009.01.18
고향집 풍경  (0) 2008.09.09
우리는 추억을 만들려고 사는거 아닐까?  (0) 2008.08.29
여수의 사랑  (0) 2008.07.21
유년으로 돌려놓은 돌탑  (0) 2008.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