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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고향집 풍경

 

1.

뒤치재 넘어 엄니와 함께하는 길

산에서 내려온 풀들 차지가 된 옛길에

푸드득 꿩이 날아오른다.

겉보리 서 말 짊어지고 분가했다며

추억인양 아픈 편린 꺼내는 당신

그 옛날 도깨비들은 어디로 갔을까?


2.

무너진 돌담 돌아들어 태 자리 들여다보니

금방이라도 삭아 내릴 듯 힘겨운 오두막

식어버린 굴뚝 옆 홀로 핀 봉숭아

뒤란 대밭에 걸린 낮달 힘없이 반기며

그 겨울 밤 닭을 채가던 삵도 이사 갔단다.


3. 

검버섯 꼬부랑 숙모가 반가워 내미는 갈퀴손

오늘하루 배추밭에 농약치고 왔다며

몇 개 남은 누런 이빨 사이로 흰 웃음 짖는다.

아이들 울음소리 사라진 텅 빈 고향에

말라비틀어진 옥수수 대가 서럽다.


“왼다리 잡을래? 오른다리 잡을래?”

밤이면 도깨비불이 춤을 췄다던 전설 같은 얘기를 떠올리며

뒤치재로 길을 잡았다.

경운기 하나 간신히 다닐만한 옛길은 풀들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겉보리 서 말 짊어진 아버지를 뒤따라 나를 업고 이 길을 넘었다며

추억인양 회한의 한숨을 쉬는 어머니를 훔쳐보니 이슬이 맺혀있다.


고향을 등지고 타관으로 분가하던 당신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세끼 밥만 먹어도 부자소리 듣던 가난한 시절!

당신들의 청춘은 간곳없고 홀로된 어머니는 가난한 추억을 꺼내든다.


차바퀴 빠질까 가슴조리며 핸들을 잡으니 길섶 나무들이 차창을 할퀸다.

몰랭이에 올라서자 멀리 고향땅이 보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봐도 그 옛날 도깨비들은 �아 오지 않는다.


해마다 은행이 익을 무렵이면 할아버지 제삿날이 다가온다.

얼굴 모르는 할아버지 기일이 마치 명절인양 좋아 날뛰며

큰댁으로 향했던 유년의 추억들이 서럽다.

태 자리 고향집 마을에 들어서면 바람처럼 논두렁을 달려오는

사촌들이 있었건만 이제 그들은 간곳없고 말라비틀어진 옥수수 대 만이

힘없이 나를 반긴다.


“오메. 누구다냐?”

팔순이 모레인 숙모가 농약 통을 짊어지고 갈퀴같은 손으로 나를 반긴다.

어머니와 같은 나이건만 촌에 산 죄로 오늘하루 뙤약볕에서 농약 통을

짊어지고 숙명처럼 살아가는 숙모의 굽은 허리를 보니 화가 치민다.

김장배추 보내면 서울에 있는 자식들이 이런 속을 알기나 할까?


“대롱 오셨소?”

해마다 기일이 되면 장조카 혼자서 제상을 차렸는데 요 몇 해

내가 얼굴 내미니 사람 사는 것 같다며 형수가 반긴다.


“작은 엄니. 뒷밭에 고추 심어놨어라우”

형수가 고추를 따가라며 말을 빼자 엄니는 비닐봉지를 들고 나선다.

태 자리 고향집은 돈 많은 도회지 사람이 별장을 짓겠다며 사들여

묵혀 둔지 몇 해가 지나 마당에서는 무성한 잡초가 나를 반기고

식어버린 굴뚝 옆에 봉숭아꽃이 홀로 외롭다.


머리 가죽을 벗길만큼 이글거리던 태양도 어느덧 힘을 잃은 뒷밭에는

고추풍년 참깨 풍년이다.

어느덧 참깨는 갈무리를 하고 있는데 윗부분에서는 아직도 꽃을

피우고 있다.

어머니는 참깨 윗부분을 툭툭 따내다 말고 고추 밭으로 간다.

“왜 끝을 잘라?”

“잘라줘야 깨가 제대로 여물어”

뒤늦은 꽃은 여물을 맺지도 못하고 양분만 빨아 먹는단다.


“엄니 그만 따”

어차피 엄니도 혼자고 주말부부인 나도 혼자인데 고추 몇 알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형수가 애써 가꾼 밭농사를 추억을 더듬어 즐기는 것 같아 사치스럽다.


유년의 추억을 더듬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낮달이 대밭에 걸려있다.

벌써 가을이 오고 머잖아 소슬바람 불어오면 또 한 해가 저물 것이다.

나의 재촉에 고추를 따다 말고 앞서는 엄니는 그 옛날 가난한 시집살이도

지나고 보니 추억이라며 연신 대밭을 기웃거린다.


“엄니. 호박!”

한 두 번 본 호박이 아니건만 길섶에 몸을 숨긴 그를 보니 새삼 반갑다.

바랭이를 젖히고 보니 황소가 질펀하게 퍼질러 놓은 똥처럼

크게 자리를 차지한 누런 호박이 배꼽을 내놓고 숨을 죽이고 있다.

그는 숨바꼭질 하다 들킨 어릴 적 춘식이처럼 멋쩍은 듯 볼을 붉히며

히죽이 웃는다.


“엄니. 호박이 배꼽을 내놓고 있네?”

“엉. 그건 약 된단다”

자세히 보니 발랑 누워 배꼽을 하늘로 내 놓는 모양새가

백호야 날잡아가라는 듯 똥배짱이다.

나 이제껏 살아오며 배꼽을 내놓은 호박을 본적이 없거니와

약이 된다는 말에 도심이 발동하여 딸까 말까 망설이며 엄니를 돌아보니

얼른 가자며 눈에 힘을 준다.


주인인들 약호박이 열린 줄 알까마는 한 낱 호박에 양심을

팔지 않은 것이 마음에 평화를 가져온다.

지난여름 털 가시를 세우던 호박 이파리는 힘을 잃기 시작하건만

철지난 호박꽃이 철없이 피어나 삶의 한 자락을 붙들고 있다.

떠날 때를 알고 걸맞게 살아야 고고한 삶이련만 연민의 정이 앞선다.


사람들도 떠날 때를 알면서도 연연하면 추하기 짝이 없듯

서산에 기우는 한 뼘의 해를 잡으려 몸부림치는 인생이 가엾다.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마치고 주말부부를 면하면 정말 행복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태동안 혼자 사는 것에 길들여진 나만의 공간에

가족이라는 이름들이 끼어들면 거추장스럽지 않을까 모르겠다.

가을을 타는 남자에게도 그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0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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