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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여수의 사랑

 

여수(麗水)는 단어가 뜻하는 것처럼 물이 빛나는 아름다운 도시다.

세계 3대 미항이라는 브라질의 리우, 호주의 시드니 그리고 이탈리아의

나폴리라 한들 여수에 견줄 수 있을까?

그것은 프랑스의 센강이나 영국의 템즈강이 한강보다 못한데도 

턱없이 과장되어 실망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수는 둔덕이라는 언덕을 넘고도 한참을 지나야 모습을 드러낸다.

둔덕을 넘어설 때까지만 해도 설마 항구도시가 있을까 싶을 만큼

몸을 감추는 곳이 여수다.


오랜만에 여수를 들러 먼발치로나마 오동도를 보고자 다가갔으나

긴팔을 늘어뜨린 주차장 차단기가 매정하게 거절한다.

맥없이 발길을 돌리는 뒤통수를 보고 전라선 종착역인 여수역이 씽긋 웃는다.

이곳 여수역에는 하루에 몇 번쯤 기차가 내려올까?

아니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손님이 있기나 한 걸까?

애먼 걱정을 하며 만성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만성리는 검은 모래가 유명한 해수욕장으로 해운대나 대천만큼은 못해도

한 때는 남도의 이름난 해수욕장이었다.

30여 년 전 첫 근무지로 발령받았던 오랜 기억을 더듬으며 다가가자

차 한 대가 겨우 통과할 만큼 좁은 터널이 나를 맞는다.

터널 내벽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미처 화장을 못한 여인네가 허겁지겁 손님 맞듯 울퉁불퉁한 모습이다.

 

 이 터널은 일제 강점기인 1926년에 우리의 조상들이 정과 망치로

돌을 깨부숴 만든 수작업 터널이란다.

마래터널이라는 원래 이름이 있지만 만성리터널로 더 알려진 이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몰아쉬었을까?


식민지를 만들어 단물을 빨아가기 위해 철도를 깔고 터널을 뚫으며

마치 그들이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커다란 공헌을 한 것처럼 위장하는

뻔뻔함 뒤에 또 하나의 야욕인 독도가 보인다.

역사의 한 숨 뒤에 버려진 터널은 마주 오는 차가 비킬 수 있도록

군데군데 주머니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답답한 가슴을 쓸어안으며 터널을 빠져 나오니 장대 끝에 삼각 깃발을

팔락이는 고깃배들이 웅성거리며 해수욕장을 차지하고 있다.

아직 이른 해수욕장이니 어떠랴만 따뜻한 아랫목을 차지한

방정맞은 고양이처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보노라니 얄밉기 짝이 없다.

연신 장난을 걸어오는 파도 앞에서 까르르 웃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선구를 손질하는 어부의 손놀림만 부산하다.


허리에 군용 탄띠 두르고 석유버너에 코펠이면 부러울 게 없던 그 시절!

텐트 앞에서 맘보춤을 추던 그 시절의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덧없는 세월 앞에 초로의 늙은이가 된 나처럼 그들도 추억을 더듬을까?

아니 30년 전 그 처녀는 어떤 생각에 잠길까?


고기비늘처럼 반짝이는 파도를 끼고 달려가자 이름도 생소한 신덕 해수욕장이

슬쩍 얼굴을 내미는가 싶더니 숨어버린다.

차를 돌려 다가가자 그 때서야 배시시 웃으며 부끄러운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이정표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손바닥 만 한 해변을

보고 있자니 외국의 낯선 바닷가에 온 듯 생경하다.

 

번거로운 동해안을 피해 이곳으로 피서를 오면 어떨까?

여름휴가를 떠올리니 힘을 잃어가는 태양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른 듯 하다.

돌산도를 한 바퀴 돌아 이곳 방파제에서 소주잔 기울이며

남쪽 하늘 어딘가에 있을 십자성을 찾아보는 것도 그럴 듯하다.


배후도시 여천을 중심으로 공업단지가 들어서던 70년대에

젊으나 젊은 날 난 이곳 여수에서 사랑을 알았다.

콩깍지가 끼면 처갓집 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더니 그 짝 난 게 아닌 가

싶을 만큼 그녀가 살고 있는 여수는 이름도 도시도 아름다웠다.

밤늦게 술 마시고 비틀거리는 사람도 싫지 않았고 중심가 로타리를 벗어난

어시장에서 비릿하게 불어오는 갯냄새도 싫지 않았던 젊은 날이 떠오른다.


그녀와 사랑을 키워온 나는 평생 함께 하겠다며 부모님께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는 별로 맘에 들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불안한 침묵을 깨뜨리듯 아버지는 느닷없이 신체검사서를 요구했다.

이유인즉 몸이 너무 약해 애기나 제대로 낳겠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건 트집이고 도를 넘어선 무례임에 틀림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맘에 두고 있는 처녀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치고 논갈이 때 쟁기 품이 급하지 않는 사람 없고

장사하는 사람치고 급전 돌려 막을 일 없는 사람 없다.

쟁기질을 할 때마다 사정하다시피 날짜를 받아오고 혹시나 약속을

파할까봐 선금을 주고 쟁기질을 맡기는 형편이니 소를 키우는 사람이

그런대로 대접을 받는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집 쟁기질을 도맡아 해주는 박씨네가 고마울 따름이고

그러다 새참을 이고 오는 그 집 딸에게 마음을 빼앗겼단다.

엉덩이도 커 애기도 잘 낳겠고 싹싹한 처녀를 지켜보다가 내심 며느리 감으로

점 찍어두고 두 분간에는 묵시적으로 사돈이 되기로 약조를 했더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정말 생뚱하게도 허리가 한주먹밖에 안된 여자를

데리고 와 장차 며느리라고 소개하니 맘에 들 리가 만무했고 게다가

박씨네와의 보이지 않는 약조를 파기하기가 미안했을 것이다.

나이도 동갑이라는 것도 맘에 안 들던 차에 밑져야 본전이니

신체검사서를 요구하게 된 것이었다.


그녀에게 신체검사서를 요구했던 무례를 사과하지 못하고 살아 온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방파제에서 소주한 잔 기울이며 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면 아내는 용서할까?

아니 또 눈을 흘길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자존심이 상한다고’

-여름이 오기 전 여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