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 인생이 뭔지 알 듯 한 나이가 되자 지나온 세월과
흘려보낸 시간들이 너무나 아깝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이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착각을 하며 허비했던 젊은 날!
며칠 밤을 잡기에 탐하고 밤새도록 술독에 빠져 세상을 원망하던 시간들은 독이다.
휴일에 늦잠을 즐기고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식곤증에 눈을 감으면
여지없이 또 잠속에 빠져 어둑어둑한 저녁에서야 눈을 뜨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이유 없이 나 자신에게 화가 나 후회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잠든 시간은 죽어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주말을 맞아 무등산을 찾았다.
산을 좋아하지만 솔직히 집을 나서는 순간이 쿨하지는 않다.
모처럼의 휴일에 늦잠을 즐기고 싶은 유혹이 앞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전제를 달면 나태한 마음을 이겨낼 수가 있다.
어쩌면 이번 무등산 산행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마음을 다잡으니
갑자기 무등산 어딘가에 두고 온 물건이라도 있는 양 마음이 바빠졌다.
산장에서 꼬막재를 넘어 규봉암의 오묘한 너덜겅을 보고
장불재로 가는 코스는 치맛자락을 잡고 한 바퀴 도는 형국이다.
사실 그 코스가 무등산에서는 제일 긴 코스로 그리 녹녹한 편이 아니다.
늦재를 거쳐 중봉을 밟고 서석대로 가는 쉬운 코스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그 이유하나 때문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절박감을 주어 힘들거나 귀찮은 일도
스스로 골라 하도록 하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부모님께 재롱잔치를 할 때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다가가면
귀찮은 마음이 사라져 효도가 저절로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산장 음식점 길가에는 토란대와 도토리 한줌이 느긋이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지난여름 찬란히 빛나던 그 햇살이 쇠잔한 몸을 이끌고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 붓는 모양이 마치 아자아장 걷는 아기의 손에 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듯 힘을 잃었다.
검푸른 위용을 자랑하던 산자락의 나뭇잎들도 벌써 누릿하게 물들기 시작한다.
산장은 내게 씁쓸한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신혼 여행지였던 이곳 어디선가 소위 깡패들과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여 기억하기 싫은 가난한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 당시로 치면 제주도나 설악산 정도는 가야 할 테지만 기껏 간다는 곳이
이 곳이었으니 배짱이 없는 건지 준비성이 없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3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버린 그때 그 산장호텔이 어디쯤이었는지
눈대중을 해보건만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흘러버린 세월 속에 햇살 한 움큼 받으며 산모퉁이 초입으로 들어서자
한 떼의 젊은이들이 산행을 서둔다.
대학생 차림인 그들의 싱그러운 미소를 보니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다.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산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가상하기도 하다.
그들을 지나치려다 말고 마주 친 어디선가 본 듯한 중년의 사내를
빤히 바라보자 그 또한 나의 눈 화살을 피하지 않는다.
모자를 벗어들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보니 그는 후배인 전북대 교수였다.
그러고 보니 제자들과 무등산을 찾은 거란다.
젊은이들과 함께하는 그 복을 나눠가질 수 없음을 시샘하고는 산길로 접어들며
그와의 인연을 떠올려보니 인생은 덧없지만 인연은 고귀하다.
꼬막재를 지나 억새밭으로 접어들자 억새가 백발을 남쪽으로 틀고 나를 맞는다.
이들이 지난 가을에도 그쪽으로 머리를 둘렀을까?
혹시 그들은 벌써부터 내년에 불어올 따뜻한 남쪽 바람을 고대하며
그리움의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덜겅이 한쪽에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열자 묵은지가 하얗게 분칠을 하고 있다.
주섬주섬 싸온 군내 나는 묵은지가 숙성도를 넘어 맛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반찬타령은 배부른 자의 투정임을 알겠다.
멀리 내려다뵈는 화순 수통골 손바닥 논들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그들도 잔광을 받아 마지막 알곡을 여물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장불재로 들어서니 무선기지국이 마치 우주선이 내려와 앉아있기라도 하듯
생경한 얼굴로 어울리지 않게 나를 맞으며 평온하던 내 머리를 쾅하고 두들긴다.
거대한 금속 사다리에 세숫대야처럼 매달린 접시 형 안테나에서는
금방이라도 우주인이 나타날 것만 같다
우리 인간들은 편리한 삶을 위해 대책 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낯선 기괴한 쇳덩이들을 아무 곳에나 늘어놓고
자랑스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장불재라는 이름도 불상놈 같은 느낌이 든다.
햇살 한줌 받으며 고개를 젖힌 하늘가에는 은빛 비행기가 날고 있다.
은빛 억새는 환경이 어찌되건 말없이 남쪽으로 고개를 두르고 있었다.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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