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기

쓰지 못한 가을동화

 

 

이제 나도 느긋한 마음으로 추석을 맞는 여유가 생겼다.

교통이 혼잡한 연휴를 피해 고향을 찾아도 될 만큼 애들이 자랐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난 지 25년 동안 명절은 나에게 스트레스였다.

명절 때마다 10시간 이상을 고속도로에서 보내는 것은 차라리 고문이었다.

그렇다고 서울에 남아 텅 빈 거리를 바라보며 명절을 맞는다는 것은

장남이라는 정서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쓸쓸해 못 견딜 것이다.

그토록 어렵게 고향집을 찾아가건만 노모와 동생들은 그런 고통을 모른다.

더구나 하루 더 쉬었다 올라가라는 노모의 말을 들으면 몰라도 너무

몰라준다 싶어 야속하기도 했다.

내가 이럴 진데 장남 며느리인 아내는 명절증후군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형님! 이제 형님 속을 알겠어.”

추석날 느닷없이 내 속을 알겠다는 동생의 말은 스스로 귀성전쟁을

치러보니 그동안의 내 심정을 이해하겠더란다.

작년에 서울로 발령을 받아 두 해째 귀성길에 오른 동생네 가족이

뒤늦게나마 이해해주니 올해는 무엇보다 값진 友愛를 추석선물로 받았다.

사실 다섯 식구가 움직이면 오가는 교통비도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조카들 용돈이라도 주고나면 지갑은 텅 비어 갑자기 가난해져버린다.


올 추석은 고속도로가 막히건 말건 사자가 코끼리 보듯 느긋한 마음으로

노모를 모시고 밤 주우러 나섰다.

10여 년 전 친척집 밤 밭에서 오지게 큰 알밤을 줍던 추억이

새록새록 하건만 그 후로는 밤다운 밤을 주워본 기억이 없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벌써 지나간 건지 아니면 다람쥐가 가져간 건지

텅 빈 밤송이들만이 오소리처럼 갈색 침을 세우고 나뒹굴어져 있다.

야산의 쥐 밤 몇 알을 줍다말고 섬진강으로 향했다.

뒤늦게 합류한 동생이 밤나무 있는 곳을 잘 안단다.


곡성 기차마을로 차를 몰자 한 두 방울 내리던 비가 기어코 우산을 청한다.

섬진강 변에 자생하는(?) 밤나무 밑으로 내려섰다.

떨어진 밤송이들이 반쯤 입술을 벌리고 갈색 볼을 붉히며 반짝인다.

밤나무를 흔들어 댈 때마다 우산위로 투둑 투둑 밤송이가 굴러 떨어지는

폼이 아무래도 수상쩍다.

사람들이 아직 주워가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 좋은 탓이라며

밤톨을 까내는 머릿속으로 가을비가 속삭이며 지나간다.

‘이보게. 이 가을에는 뭘 거둘건가?’

이제 가을이 두 번만 더 지나면 나는 야인이 되어 이산 저산을 해맬 것이다.

이제 곧 출간될 ‘하늘소의 꿈’에서처럼 내 꿈은 애초부터 없었다.

인생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모르고 살아온

자신을 돌아다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갑자기 우산 속에 쭈그리고 앉아 밤송이를 벗기는 뒤통수가 소란스럽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선 아줌마가 나타나 왜 남의 밤을 도둑질하느냐며

어머니에게 삿대질을 한다.

주인의 눈을 피해 비오는 날을 잡은 것을 보니 계획적인 도둑놈들이라며

몰아 부친다.

아내야 그렇다 치고 어머니와 제수씨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아주머니! 주인 있는 밤나무인줄 몰랐어요. 드리고 갈테니 화 푸세요”

“뭣이여? 돈내!”

근방에 인가도 없고 더구나 강둑의 밤나무가 주인이 있다는 것이

이상하기도 하지만 하여튼 당신이 주인이라니 따져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우리는 엄청난 파렴치범으로 몰리고 만 것이다.

까짓것 밤이야 몇 푼 안 되지만 돈으로 치면 줍는 즐거움만할까?

난감한 상황을 빠져 나오기 위해 동생이 만원을 건네주자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안 받겠다며 손을 뒤로 감춘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대신 밤은 가져가겠다며 억지로 돈을 쥐어주고

도망치다시피 그곳을 빠져나온 우리의 몰골은 비에 흠뻑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있었다.

농심을 훔쳐가는 도둑놈으로 비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만원이라도 쥐어주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하기는 하다.


“우리 코스모스 축제 보고 가자.”

“뭔 축제는 축제여? 그냥 가.”

기왕 왔으니 코스모스 축제를 보고가자는 아내의 철없는(?) 제의에

똥 씹은 듯 더러운 기분이 들어 벌컥 화를 냈다.

“그래. 아까 그 기분 잊어 불고 코스모스 보고가자!”

어머니가 아내 편을 드는 것은 장남며느리라 그런 걸까?

“형님! 가을동화도 쓰게 코스모스 축제 보고 갑시다. 사진도 찍고”

동생마저 장난 끼를 머금고 맞장구를 친다.

‘무슨 얼어 죽을...... 가을동화 쓸 기분이 나?’

입언저리에서 뱅뱅 도는 말을 참고 축제장으로 향했다.


그래!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 나이에 추억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일까?

여고시절의 코스모스에 대한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 걸까?

아내의 추억 보따리를 열어볼 수는 없지만 그것은 어쩌면 빛바랜

가을동화일지도 모른다.

오늘 우리가 도둑으로 몰린 것도 추억으로 남을까?

071001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년으로 돌려놓은 돌탑  (0) 2008.05.29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살아간다면....  (0) 2007.10.29
대천 해수욕장의 동백아가씨  (0) 2007.09.18
짧은 동행  (0) 2007.09.10
[스크랩] ★ 우리나라 산 모음 ★  (0) 2007.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