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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14. 농번기 방학

 

농번기 방학을 맞았습니다..

오늘은 홀테(1)로 보리 모개를 훑는 날입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들고 마당에는 빙 둘러 홀테가 세워졌습니다.

어머니는 남은 잿불에 마른 실 갈치를 구워 놉들에게 줄 별찬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헛청에 있던 백구는 북적대는 사람들이 귀찮은지 뒤란으로 돌아 들어갑니다.

갑자기 닭들이 회를 치며 소리를 질러대는걸 보니

백구 녀석이 닭들을 건들고 있나 봅니다.


자칫하면 닭들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 집으로 안 들어 오기도합니다.

걱정이 되어 뒤란으로 돌아가니 아니나 다를까

백구가 닭들에게 장난을 걸며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백구! 콱!”

내가 손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자 금방 고개를 내리깔고 복종을 합니다.

닭들도 나의 역성에 안심이 되는지 이내 울타리 밑에서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발톱을 세워 울타리 밑을 후벼 파기 시작합니다.


춘식이와 지만이가 울타리 밖에서 나직이 나를 부릅니다.

난 집을 빠져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바쁜 날 놀러 나간다는 것은 벼룩도 낯짝이 있습니다.


“이삭 줏으러 간다그래!”

춘식이의 그럴듯한 유혹에 빙긋이 웃으며 마당으로 돌아 나왔습니다.

“어무니! 나 이삭 줏으로 갈께!”

난 바구리(바구니)를 들고 춘식이를 따라 논으로 갔습니다.

들판은 대부분 보리를 베어내고 벌써 물을 가두어 둔 곳도 있습니다.


난 이삭을 모아 에노구(2)를 사고 싶었습니다.

에노구는 병뚜껑처럼 양철 판에 딱딱하게 굳은 물감이 채워져 있습니다.

언제가 학교 연못가에서 에노구에 물을 묻혀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선생님을 보고

에노구만 있으면 정말 그림을 잘 그릴수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크레용은 힘주어 문질러야 되지만 에노구는 슥슥 지나가기만 해도 그림이 그려집니다.


멀리 논둑길로 지게 가득 보릿단을 진 아저씨들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옵니다.

마치 아라비아 사막의 대상들이 낙타를 몰고 가듯 지쳐 보입니다.

정말 먹기도 사나운 것이 일거리도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키가 훌쩍 자란 못자리가 들판 군데군데 파란 잔디밭처럼 각단지게(3) 서있습니다.


길에 떨어진 보리이삭을 몇 개 줍다가 수확이 끝난 논으로 내려섰습니다.

실은 아직 수확이 덜 끝난 보리를 훔치고 싶지만 차마 그것은 못하겠습니다.

논두렁 풀밭에는 아직 팬티를 입지 않은 메뚜기 새끼들이 툭툭 튀어 오릅니다.

가끔 때때시(4)가 ‘떼떼떼’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고 허우대만 멀쩡한 땅개비(방아깨비)가

파란 속살을 내놓고 반라의 모습으로 튀어 도망갑니다.


우리가 못자리로 내려서려니 오포(5)의 사이렌이 울립니다.

정오가 아닌데 우는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오늘이 현충일입니다.

우리는 사이렌이 그칠 때까지 땅에 서서 묵념을 올렸습니다.

못자리를 지나가려니 내 주먹만한 우렁이가 파란 이끼를 뒤집어쓰고 땅에 고개를 박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삭줍기를 때려치우고 이논 저논 못자리를 쫓아다니며 우렁이 잡기에

빠졌습니다.


1) 홀테 : 빗을 세워놓은 모양을 갖춘 보리나 나락을 훑는 연장

2) 에노구 : 그림물감의 일본말

3) 각단지다 : 단호하거나 확실한 모양 또는 질서정연한 모양으로 전라도 방언

4) 때때시 : 메뚜깃과의 곤충으로 몸의 길이는 4~5.7cm임 방아깨비와 비슷하나 몸이 가늘고 길며 황록색이며 날 때에는 '딱딱딱' 소리가 남. “딱따기“가 표준말임

5) 오포 : 낮 12시를 알리는 대포를 말하는데 사이렌을 울려 정오를 알리는 망루를 말 함.


***홀테는 전라도지방 방언으로 벼나 나락 이삭을 훑는 빗을 세워놓은 모양을 한 연장이다. 집집마다 홀테를 세워놓고 보리 모가지를 빗 사이에 끼워 잡아 다니면 모가지가 떨어진다.  우리는 그 보릿대를 이용해 여치 집을 만들기도 하고 어떤 집은 밀짚모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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