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없이 당산나무 밑으로 갔습니다.
전장에 나가는 군인들처럼 춘식이와 지만이의 굳은 결의가 엿보입니다.
춘식이가 반바지 꼴마리(1)에서 성냥 알맹이 2개를 슬쩍 보여줍니다.
맬갑시 벌벌 떨리고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지만이도 나랑 똑같이 큰 눈을 끔벅거리다 눈을 내리깝니다.
그래도 우리는 사나이들인데 한번 맘먹은 것을 결코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동네 어귀를 벗어나 며칠 전에 찜해둔 논을 향해 말없이 걸어가니
대낮의 이글거리는 태양이 머리 박 위에서 우리를 감시하는 듯 합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춘식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앞서 걸어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걸어보기는 처음 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찜해둔 논이 가까워지자 점점 더 불안해집니다.
난 우리를 뒤쫓아 오는 사람이 없는지 주위를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보리물결이 일렁일 뿐 사위가 고요합니다.
춘식이가 논둑길을 지나가며 태연하게 보리 모개(2)를 뽑습니다.
누가 봐도 그냥 지나가는 폼입니다.
우리도 춘식이처럼 보리 모개를 뽑아 쥐며 논두렁길을 걷기 시작 했습니다.
어떤 놈은 들통 나기 딱 맞도록 뿌리까지 뽑혀 올라옵니다.
우리는 한 움큼씩 보리모개를 움켜쥐고 가재 잡던 개울가로 냅다 달렸습니다.
작은 모래톱에 툭툭 알이 밴 푸르스름한 보리모개가 성난 듯 누워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보리밭 고랑에 누렇게 삭은 독새기(3)를 뜯기 시작했습니다.
독새기는 어릴 때부터 보리와 같이 살아가는 풀입니다.
춘식이가 꼴마리에서 조심스럽게 성냥을 꺼냅니다.
근데 춘식이 손에 들린 성냥은 땀에 흠뻑 절어 빨간색 물감이 흘러나옵니다.
성냥을 그어대 보지만 빨간 꽁다리가 뭉개지고 맙니다.
나도 지만이도 춘식이 얼굴만 쳐다봅니다만 낙심한 얼굴빛이 역력합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고 쫄쫄 흐르는 개울물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립니다.
“야! 우리 저 나무를 문대자!”
자연시간에 배운 데로 불씨를 만들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합니다만
자신 없는 표정들입니다.
작년 홍수 때 흘러가다 걸린 바짝 말라비틀어진 나무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번갈아 가며 나무 막대를 문질러대지만 노릿하게 나무 타는 냄새만 날 뿐
좀처럼 불이 붙지 않습니다.
바지가 반쯤 벗어진 춘식이 엉덩이 위로 햇빛이 내려 꽂힙니다.
땀범벅이 된 나는 지쳐 아무렇게나 누워버렸습니다.
뻐꾸기 소리가 자꾸 꿈나라로 불러들입니다.
지만이와 춘식이가 끈질기게 문질러대다가 그들도 녹아 떨어져 버립니다.
이번에는 내 차례입니다.
정신을 가다듬고 나무막대를 힘 있게 쥐고 문질러댔습니다.
금방이라도 불이 붙을 듯 연기가 오르지만 좀처럼 불이 안 붙습니다.
화가 난 나는 나무막대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나뒹구는 나무막대를 노려보았습니다.
나무막대 옆에는 아까 버린 성냥 한 개비가 빨간 버찌 열매처럼 누워있습니다.
다가가 성냥을 주워들다 말고 깜짝 놀랐습니다.
성냥은 거짓말처럼 바짝 말라 딱딱하게 굳어있었던 것입니다.
“춘식아! 됐다! 언능 인나봐!”
춘식이가 스프링처럼 일어나 조심스럽게 성냥을 그으니 확 불이 일어납니다.
독새기 타는 연기와 보리모개 익는 냄새가 어우러져 하늘로 올라갑니다.
숯검정처럼 겉이 탄 보리모개를 주워들고 손바닥에 비벼 불어내니
푸르스름한 보리알이 초롱초롱 눈알을 반짝이며 손바닥 안에 모여 있습니다.
구수하게 익은 보리알갱이의 쫄깃쫄깃한 맛이 보리밥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춘식이 얼굴에도 지만이 얼굴에도 숯검정이 묻어 함진아비 같습니다.
내가 그들을 보고 웃자 그들은 나를 보고 웃어댑니다.
1) 꼴마리 : 허리춤의 전라도 방언
2) 모개 : 곡식의 이삭이 달린 부분, 모개미라고도 함
3) 독새기 : 둑새풀의 방언, 볏과의 한해살이풀로 보리밭에 주로 자라고 늦봄에 엷은 녹색 꽃이 피며 보리 수확기에 생을 마침.
*** 보리모개가 살이 찐 5월에 주인 몰래 보리서리를 하곤 했다. 보리서리는 보리찜이라고도 불렀는데 논둑 옆에서 밀이나 보리를 태워 손바닥에 비비면 파란 알갱이가 나온다. 배고픈 그 시절에는 간식거리로서는 최고로 칠만큼 구수한 맛이었고 나중에 주인이 알더라도 너그럽게 봐주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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