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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어무니! 내년에도 같이 가!

 

얼마 전 팔순을 바라보는 노모를 모시고 예정에 없는 휴가를 떠났다.

발 닿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은

애당초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그런 나들이를 좋아한다.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족쇄를 채워 놓은 듯 답답하기 때문이다.


경춘가도로 따라 가다가 느닷없이 경기도 북단에 자리한 ‘신북온천’으로 방향을 돌렸다.

꽉 막힌 도로가 인내력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짜증 낼 수도 없는 익숙지 않은 연기를 하며 온천에 다다랐다.

숙소가 마땅찮고 음식점 또한 허술한 온천주변이 황량하다.


노모와 함께 한 밤!

어쩌면 이번 여행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하지만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어무니,  좋제?”

“오냐, 좋다야.”

한숨 섞인 듯 대답하는 어머니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든다.

책을 읽다말고 곤히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저승꽃이 더욱 뚜렷하다.

‘어무니!  합쳐 살자니께 왜 촌에서 혼자 그래?’


당신은 서울이 감옥살이라며 홀로 시골집 지키기를 고집하신다.

반찬 만들기 귀찮아 개밥처럼 끼니를 때우는 당신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화가 났다.

이웃보기 창피해서도 모시려고 하지만 결국 그것도 어머니 뜻이다.

아니 어쩌면 당신과 떨어져 사는 것에 익숙해진 내가 내 울타리 속으로

당신이 끼어드는 것을 머쓱하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내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이튿날 지도를 더듬거리며 낯선 길을 가다보니 숭의전이란 곳이 손짓한다.

숭의전 입구에 다다르니 말에서 내리라며 ‘下馬碑’가 나를 가로 막는다.

안내소에 들어서자 사적 지킴이 한분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다말고 나를 반긴다.

맞어! 저렇게 사는 것이 정말 멋진 삶인데.....


숭의전은 아미산이 달려 내려오다가 임진강을 만나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멈춘 선 듯 가파른 비탈 위에 터를 잡은 고려왕 네 분 위패를 모신 곳이다.

낙화암이 삼천 궁녀를 삼켰다면 이곳은 삼만궁녀를 삼키고도 남을 만큼

넓은 임진강이 검푸른 비늘을 반짝이며 흘러가고 있었다.


초여름 매미가 속절없이 울어대는 숭의전을 돌다보니

문득 옛 선조들의 정치적인 역학관계가 떠오른다.

멸망한 고려왕실에 대한 조선왕실의 배려 앞에 선조들의 넉넉함이 배어있다.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미화시키기 위해 전임자의 공적을 깎아 내리고

잘못을 들춰내 흠집 내는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자 쓴웃음이 스친다.


숭의전을 돌아 나와 어수정에서 석간수 한 모금에 목을 축이며 올려다보니

밤나무와 귀롱나무가 다정하게 벗하고 있다.

밤나무 어께 위에 팔을 걸친 귀롱나무가 어우러지는 저 모습이 연리지인가?

저렇듯 서로 근본이 다른 종(種)이 어우러져 살아가는데 우리는 어떤가?


그들을 뒤로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가만히 내손을 쥐어보신다.

옛날 당신의 분신임을 직접 확인하고 싶으셨을까?

이미 당신 품을 떠나 남처럼 살아온 지가 벌써 30년이 넘었으니

당신의 가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이 켜켜히 쌓여 있을까?


갈퀴 같은 힘없는 손은 자식들을 키워내기 위해 저리 되신 것인데

나는 마치 나 혼자의 힘으로 오늘이 있는 양 은혜를 모르는 천하에 없는 불효자다.

이순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치고 만다.

어무니! 내년 여름에도 우리 같이 여행 갈 수 있지?


** 숭의전은 사적 223호로 네 분의 고려 왕(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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