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각 낙성대 전철역을 빠져 나왔다.
동료들과 술 한 잔 마시고 불콰한 얼굴로 개찰구를 빠져 나오자
평소에는 안 보이던 젊은 여인이 등산용 돗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
낙성대 역 1번 출구는 간이 꽃집도 철거한지 꽤 지나 조명도 어둑하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한데 얼핏 지나치며 보니
‘동전지갑 1,000원’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계단에는 언제나 중학생 쯤 되어 보이는 애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쭈그려
앉아 있곤 했는데 시간이 지나 돌아갔는지 한적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끌려가 듯 계단을 오르다 말고 되짚어 내려갔다.
모자를 깊숙이 써 얼굴을 가린 젊은 여인의 앞에는 천으로 만든 동전 지갑과
실내화, 그리고 손잡이가 있는 가방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술 취한 김에 용기가 생겨 동전 지갑을 만지작거리자 지나가던 젊은 처녀가
다가와 이 것 저 것 물건을 살펴본다.
음식점이던 가게든 사람이 북적거려야 사람을 보고 또 사람이 몰려드는 모양이다.
물건들은 소꿉장난을 하려고 만들어 온 것처럼 어찌 보면 조잡하여
상품이라기보다는 정성을 팔러 나온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어릴 적 생각이 떠오른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신작로 가에 점방이 달린 집이었다.
한 쪽은 참기름을 짜는 기계가 있었고 바로 옆 점방은 비어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비어있는 점방을 항상 놀려 두지만은 않았다.
어떤 때는 새끼를 꼬아 쌓아두고 팔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수박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기도 했다.
대부분의 손님은 오일장을 보러 오가는 근동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느닷없이 광주 어디선가 비누를 도방으로 사와
소매를 하신단다.
여느 가게처럼 그럴듯한 가게도 아니고 간판도 없는 점방에 아무렇게나
비누 궤짝을 쌓아 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판매한다는 것은 어린 내가 봐도
팔릴 성 싶지 않았다.
나와 동생은 백노지에 크레파스로 소위 말하는 광고전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광고 문안은 ‘나왔다! 계광비누!’라는 문구와 함께 약도를 그려 넣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전단을 붙이려고 보니 용기가 나지 않아 골목길 흙벽에
밥풀을 이겨 붙인 기억이 난다.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는 골목길 초가지붕 처마 밑에 붙여 놓고는
몰래 그 광고지를 보곤 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이 여자도 그 때 나처럼 부끄러운 건 아닐까?
“직접 만든 것이오?”
이 것 저 것 만지작거리며 말을 걸자 부끄러운 듯 그렇다고 한다.
시장이나 백화점에 가면 훨씬 고급스러우면서도 값이 싼 지갑이 있을 것이고
실내화도 굳이 5천원까지 하지 않을텐데......
실은 내가 이 죄판에 끌린 것은 소품이 맘에 들어서라기보다는 며느리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며칠 전 며느리가 아무래도 직장을 그만 둬야 하겠다며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던 기억 때문이다.
이유인즉 결혼을 하고 나니 직장의 눈초리가 달가워 보이지 않은데다
앞으로 애기를 갖게 되면 직장의 눈총을 버텨 낼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뭐를 할 거냐는 말에 녀석은 재봉 학원을 다닌 후에 옷을 만들어 팔아보겠단다.
출산률이 1.2명으로 선진국들 보다 낮다며 법석을 떨고 있지만 현실은
말로만 엄살을 부릴 뿐 출산을 장려할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을 뿐 만 아니라
아직도 이 사회가 남녀 성 차별이 공공연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지갑 한 개를 사들고 일어서자 옆에 있던 처녀가 손잡이 달린 천 가방을
만원을 내고 구입한다.
조마조마하며 물건을 팔러 나왔을 젊은 아줌마가 용기를 얻었으면 참 좋겠다.
0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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