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출처: © k-insect)
가을은 항상 서글픔을 머금고 소리 없이 다가온다.
일주일이 한 달이나 지난 양, 산에 오르면 어느새 가을이 와있다.
가을은 옻나무 이파리와 억새로부터 오고 텅 빈 들판에서도 온다.
옻나무 이파리가 붉은 옷을 갈아입고 잔치를 준비하면 山담쟁이가
가을을 알리고 억새가 은빛 머릿결로 가을 한 가운데에 선다.
적갈색 얼굴을 무겁게 늘어뜨리고 억새가 패기 시작하는 늦여름에는
설마 가을이 올까 싶지만 어느새 은빛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혼자 외롭다.
그 찬란하던 여름을 억세게 버티며 이파리에 칼을 품고 있던 그가
이제는 힘 빠진 늙은이가 되어 살랑바람에도 파르르 떤다.
그러고 보면 여름은 청춘이고 가을은 노인이다.
이제 얼마 안 있어 그는 흰빛 머리카락조차도 어디론가 날려버리고
실핏줄 같은 앙상한 줄기만 남을 것이다.
인생도 억새처럼 힘을 자랑하던 청춘이 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청춘은 소리 없이 멀어진다.
관악산 너럭바위에 앉아 해넘이에 쓸쓸히 나부끼는 억새를 바라보니
쇠잔해가는 고향집 노모가 떠오른다.
명절 때 혼자 있으면 동네사람 부끄럽다며 귀성을 당연시하던 당신이라
神主를 모셔오고 서울에서 차례를 지내자 서울 나들이를 빠지지 않으셨다.
하지만 올해는 올라온다고 약속을 하고도 고향집에 칩거하셨다.
몸이 불편함을 미리 알리면 혹여 내가 내려갈까 선의의 거짓말을 한 것이다.
엄니를 떼어놓고 추석을 쇠는 내 마음이 편할 리 없고 엄니 또한 추석전야를
쓸쓸히 보내고 추석날 아침에야 딸자식과 보냈으니 추석이 신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득한 젊은 날!
어머니와 나는 가마니에 두엄을 담고 있었다.
여름 내 삭혔던 두엄을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퍼 나르기 위함이다.
보리갈이를 위해 온 논에 두엄을 내다 골고루 뿌려야 하는 것이다.
두엄을 만들기 위해 그 여름 뙤약볕 속에서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었던 일도
짜증났지만 두엄을 운반하기 위해 가마니에 채우는 일 또한 짜증났다.
‘이놈의 농사.’
땅이 있어 소작을 하지 않으니 가슴이 뜨뜻하련만 농사짓는 일은 너무 싫었다.
쇠스랑으로 거름을 파내 소쿠리에 퍼 담아 가마니에 붓고, 쇠스랑 자루로
우겨 넣는 일은 혼자하기가 쉽지 않다.
일이 재미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마는 운동이 아닌 노동은 힘들기 마련이다.
성깔을 부리며 엄니가 잡고 있는 가마니에 아무렇게나 거름을 부어넣고 쇠스랑을
거꾸로 세워 거름을 우겨 넣었다.
‘앗!’
갑자기 엄니가 가마니에서 손을 떼고 머리를 싸안는다.
쇠스랑 끝이 그만 엄니의 머리를 때리고 만 것이다.
손가락 사이에서는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엄니 괜찮아?”
“엉. 괜찮다”
피가 줄줄 흐르는데 괜찮으냐고 묻는 나나 대답을 하는 엄니 사이에는
힘겨운 농사에 대한 분노가 흐르고 있었다.
다이야징가루를 뿌리고 반찬고가 대신 파스를 붙인 후 논으로 향했다.
일곱 가마니를 실은 리어카는 밀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여간 힘 드는 것이 아니다.
뒤에서 밀고 따라오는 엄니를 생각하니 또한 울화가 치민다.
‘꼭 이 짓(?)을 해야만 살 수 있는가?’
농자천하지대본이라지만 농사일에 뼈가 굵지 않은 나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소쿠리에 거름을 퍼 담아 추수가 끝난 휑한 논에 들어서자 논두렁에서
메뚜기가 후두둑 날아 숨는다.
거름은 돼지 마굿간의 두엄과 사람의 오줌과 똥을 왕겨에 버무려 삭힌다.
삭은 거름은 자연의 순환고리에 따라 다시 논밭으로 되돌려지기 마련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손으로 주물럭거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온 논에 거름을 흩뿌리고 나면 손톱 밑에 끼어든 거름은 파내기 전에는
지우기가 쉽지 않다.
해넘이가 가까워지는 저녁 무렵, 일을 마치고 후적 후적 세수를 하고 나면
어느덧 해는 꼴깍 넘어가고 만다.
빈 리어커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가을 저녁은 텅 빈 들판만큼이나 가슴을
텅 비게 만드는 묘한 심보가 있었다.
인생이 뭔가?
관악산 넙적바위 위에 깔개를 깔고 앉아 막걸리 한 잔을 부어놓고 보니
그 가을처럼 이 가을 또한 서럽게 지나간다.
막걸리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고 나니 젊은 날 들판의 막걸리처럼 얼굴이
뜨거워진다.
바위틈에 숨은 구절초가 텅 빈 가슴을 달래주듯 살포시 미소 짓건만
가을은 서럽기 짝이 없다.
가을 산은 혼자 가면 서럽다.
고즈넉한 산그늘이 서럽고 힘 빠진 억새를 보면 또한 서럽다.
억새처럼 쇠락한 모습으로 인생의 가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쯤 고향 들판에 서면 갈색 머플러를 두른, 알이 통통 밴 메뚜기 떼들이
텅 빈 논두렁을 날고 있을까?
09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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