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35-6도를 오르내리는 가마솥 현장으로 달려갔다.
나주 벌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거친 숨 몰아쉬듯 뜨거운 입김을
불어내고 있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 나락들이 하품을 할 뿐 모든 게 멈춰버린 듯
전봇대도 졸고 검버섯 핀 스레트 지붕의 농가도 졸고 있다.
난 차창 뒤로 내달리는 전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전봇대 허리에 걸려있는 통신선에 표식명찰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보기 위함이다.
노란 명찰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근방 어딘가에서
작업을 하는 모양이다.
봉황면을 향해 한참을 가다보니 저 멀리 전주에 매달린 조사요원이 보인다.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비 오듯 줄줄 흐르는데 전주를 오르내리는
그는 얼마나 힘들까?
우리가 IT강국이 된 것은 통신 인프라 덕분이다.
하지만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통신망을 시설하다보니
전봇대가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는 잘못 가설된 통신선을 일제 조사하기로 했다.
조사를 시작한지 일주일도 못돼 보조요원이 3사람이나 포기하고 말았다.
보조요원은 대부분 학생이거나 이제 막 군복무를 마친 젊은이들이다.
뙤약볕 아래서 근무를 하느니 비록 일당은 작지만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홀에서 서빙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으로
땀 흘리는 일을 기피하는 것이다.
“더운데 힘들죠?”
“아~니요. 할만해요”
전주 위에서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 적고 있던 보조요원이 하얗게
이를 드러내고 반긴다.
그는 준수한 얼굴에 반백의 머리가 어울리는 50대 중반으로
채용할 때부터 내 눈길을 끌던 사람이었다.
현장에서 그를 만나고 보니 마치 오래된 친구라도 만난 듯 마음이 편안하다.
초록은 동색이고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동갑내기라 정이
더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 전에는 뭐하던 사람이래?”
“아 그분이요? 전에 타이어 대리점 사장이었대요.”
그는 사업에 실패하고 한때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단다.
다행히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와 여기 오기 전 까지만 해도
소위 노가다라고 부르는 건설현장에서 허드레 일을 거들어 주다가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단다.
나이가 들어 건설 노동판에서는 별 쓸모가 없지만 그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단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의 자기를 버리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닐까?
“가족이랑은 다 있어?”
“그럼~요. 큰애가 삼성인가 다니고 그 분은 아파트 입주자 대표래요.“
정년퇴직이후 할일이 없다는 소리는 어쩌면 배부른 소리가 아닐까?
물론 노인들의 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들이 경시하는 그런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는데 있다.
우리 젊은이들은 어떠한가?
아르바이트를 해도 찬밥 더운밥을 가리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땀 흘리는 일을 천시하여 이공계를 기피하게
만든 우리사회의 시스템이 문제다.
사무실로 돌아와 그의 이력서를 찬찬히 살펴보다 말고 깜짝 놀랐다.
그는 중학교 동기동창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보다 말고 그의 머리에 깜장 교모를 씌워보았다.
하지만 그는 안전모 밑으로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릴 뿐이었다.
0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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