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문 밖에서 바라다본 어릴 적의 무등산은 항상 남빛이었다.
아득히 먼 곳에 하늘과 맞닿아 있는 무등산은 겨울이 오기 전에 벌써
머리에 하얀 눈을 이고 있었고 마파람이 불어와 기어이 비가 오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어머니 치맛자락처럼 구름을 휘감고 있었다.
왜 항상 무등산은 남빛이고 제일 먼저 흰 눈을 받아 겨울을 알리는가?
난 마치 도덕책에 나오는 ‘큰 바위 얼굴’을 떠올리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손님이었다.
그와 인연을 맺을 기회도 없었지만 어쩌다 기회가 와도 내가 먼저
못 본체 했다.
고작 가까이 대한 것은 중학교 때 송충이 잡으러 간 작고개1)가 인연의
전부였다.
“멀라고 도로 내려 올 걸 올라가?”
누군가 무등산에 가자고 유혹하던 청년시절에 내가 내뱉은 말이다.
난 그만큼 산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 민둥산으로 나무를 하러다니던 가난한 기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로 내려올 걸 왜 힘들게 땀 흘리며 올라가는지
그걸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
마음 한구석에 항상 짠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던 무등산......
광주를 떠난 지 20여년이 넘어서 그 품에 안기게 되었다.
‘광주의 의분과 남도의 육자배기를 가슴에 묻고 있는 무등산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자.’
세인봉을 향해 걷는 무등산은 어머니 젖통처럼 물렁물렁하게 다가왔다.
관악산이 바위투성이인데 보드라운 흙이 물컹물컹하게
나를 맞은 것이다.
5월의 신부는 누가 아름답다고 했던가?
여린 잎들이 팔랑거리며 제법 꼿꼿이 힘을 주기 시작한 신록은
어느덧 내 가슴을 연두 빛 청년으로 되돌려 놓는다.
산길 어디선가 푸르릉 홰를 치며 통통 튀는 꿩은 어릴 적 뒷산의 소리다.
높은 산이든 낮은 산이든 겸손해야 하건만 촐랑대는 나를
거칠게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세인봉에 올라서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무등산 봉우리가 눈을 찡긋한다.
“요리 가면 중머리재 나오요?”
“으디까지 가요?”
“서석대요”
“쬐까 빠듯 하것소. 근디 첨인갑소 이잉?”
지도를 말아 쥐고 잰 걸음으로 여인들을 따돌리자 구수한 호남 사투리가
뱅그르르 돈다.
세인봉에 올라 한줄기 바람에 가슴을 벌리니 진달래 꽃 저버린
솔숲으로 송화 가루가 그득히 달려간다.
중머리재!
이름도 참 희한하게 지었다.
스님의 머리를 뜻하는 건가 아니면 절반만큼 왔다는 뜻인가?
확 트인 중머리재에 다다르자 서석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서
내려다본다.
잡목과 억새로 밋밋한 것으로 보아 중의 머리를 닮았다는 뜻 일까?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보았던 서석대가 힘들게 올라온 나를
본둥 만둥 내려다본다.
그동안 코끼리 사자 보듯 무관심해왔던 내게 삐진 걸까?
어머니 젖가슴처럼 몽실한 봉우리가 나 보기 부끄러워 딴전을
피우는 걸까?
장불재로 난 계곡 길은 더 이상 만만하게는 허락하지 않겠다며
버티기 시작한다.
길섶에 유난히 보리수나무가 많은 것으로 보아 중머리재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계곡에는 수많은 바위 덩어리들이 지천에 널려있다.
이렇게 많은 바위덩어리는 어디서 굴러온 것일까?
큰물 지고 나면 떠내려 오는 그런 바위치고는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새뿐인 봉우리에서는 굴러올 바위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장불재로 올라서니 맞은편에 어머니 젖가슴처럼 도톰한 봉우리 두 개가
누워 있고 왼 쪽의 입석대가 비록 방탕한 아들이지만 늦게라도 돌아온
것을 반기 듯 나를 맞는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지만 다가가면 저만큼
뒷걸음 질 치는 입석대는 참숯을 구워 세워놓은 듯하다.
입석들은 대부분 5-6각형 기둥으로 7천만년 전에 용암이 수축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니 조물주의 장난치고는 희한하다.
조물주보다 더 높은 신이 조물주에게 방학숙제를 내어주자 마지못해
돌을 주물러 세워 논 것은 아닐까?
나는 엉뚱한 생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 옛날 이곳에 살던 호랑이가 산이 너무 밋밋하여 바람을 막을 묘안을
떠올리고는백성들에게 명령을 내리길
“내가 사는 이 산이 너무 밋밋하니 너희들 모두 집에 있는 기둥 하나씩
뽑아 오너라. 그렇지 않으면 매일 한사람씩 잡아먹을 것이다“
놀란 백성들이 너도나도 기둥 한 개씩을 뽑아다 바치니 호남을 호령하던
호랑이가 손수 세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피식 웃으며 입석대에 오르니 너덜겅이라 부르는 바위들이 부러져
주변에 흩어져 있다.
그러고 보니 장불재 계곡에 널려있던 수많은 바위 덩어리들이 이곳에서
굴러 내려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바위들이 서로 자태를 뽐내던 태고 적에는 금강산과
부부인연을 맺지 않았을까 싶다.
산세로 보아 금강산이 남편이라면 무등산은 틀림없이 아내였을 것이다.
남과 북에서 서로 부부애를 싹틔우며 우리민족을 낳았을 것이다.
입석대를 뒤로 돌아 서석대를 찾아보았으나 아무리 봐도
서석대는 온데간데없다.
“서석대가 어디다요?”
“요것이 서석대여라우”
“여그요? 시방 밟고 서 있는 여그가 서석대라고요?”
잃어버린 탯말로 서석대 머리위에 서서 서석대를 묻다 말고
혼자 웃고 말았다.
이곳이 내 어릴 적 보아왔던 남빛 봉우리이고 비 개인 날 치맛자락을
두르던 바로 그곳이란다.
1187m 높이라니 관악산보다 곱절이나 높다.
봄이 익어 가건만 바람 끝이 아직도 시린 것은 남도의 한을
가슴에 묻어둔 때문일까?
저 멀리 어디선가 그 때 그 소년처럼 이곳을 바라보는 이를 찾으려
눈을 들어 두리번거리건만 내 눈에는 또다시 남빛의 산들만 엎드려 있다. 060513
1) 작고개 : 신양파크호텔 뒷산 봉우리로 잣고개(잣나무) 또는 작고개(까치)로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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