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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야기들

국화꽃 피면


경비실 앞 작은 화단에 국화꽃이 폈다.
남빛 치마가 골목으로 사라지면 하릴없이 가을바람이 차갑다.
국화꽃은 절대 땅에 몸을 던지지 않는다.
그는 도도하지만 천박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는다.
입맞춤하듯 볼을 가까이 가져가면 숨겨놓은 향기를 슬쩍 내뱉는다.


향기 속에는 유년이 묻어있고 세라복 여학생이 숨어있다.

국화꽃 속에는 추수가 끝난 들판이 있다.
누런 들판이 사그라지면 서러움을 감추려 노란 옷을 갈아입는다.
국화꽃이 피면 마당에 벼 낟가리가 쌓인다.
마당에 빙 둘러 홀테를 차리고 수건을 쓴 이웃집 아낙들이 나락을 훑을 때
난 아무렇게나 책보를 던지고 짚단 속에서 백구 녀석과 뒹굴었다.


해넘이가 되면 훑은 벼가 작은 동산을 이루고 아버지 얼굴이 넉넉해진다.
홑겹 옷소매로 서늘바람이 지나가면 검불들이 장독대로 달려간다.
검불을 뒤집어쓴 노란 국화는 애처롭게 나를 올려다본다.
국화꽃 따서 제기차기 놀이하다 으스스 떨고 있으면 어느새 어둑한 저녁이 온다.
남폿불 앞에 모여 앉은 놉들이 탱그랑 탱그랑 사발 부딪히며 저녁을 먹는다.


국화꽃이 피면 세라복 여학생이 지나간다.
가슴 뛰며 훔쳐보지만 눈길 한번 안 주고 골목길을 꺾어 들어간다.
‘흥! 지가 잘 났으면 얼마나 잘 났게?’
남빛 치마가 골목으로 사라지면 하릴없이 가을바람이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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