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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야기들

비오는 관악산

 

 

아니 온다며 투정을 부렸더니 서울에도 드디어 비가 내린다.

미친 사람처럼 비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연일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열기가 숨이 막혔다.

남쪽은 비가 너무 많이 아우성인데 너무 불공평하다며 볼이 부어있던 참이었다.

냉방기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불볕 창밖을 보면 이방인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판초를 뒤집어쓰고 아파트를 나서니 엘리베이터 거울에는 마치 625동란 비 오던 날

미군들이 걸쳐 쓴 판초의 실루엣처럼 내 모습이 투영되어 온다.

어찌됐던 비오는 날 비 맞으러 나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혹시 아내가 우렁각시 숨겨 논 거 아니냐며 눈을 흘길지라도.......

 

아무튼 산으로 녹아들면 난 비로소 자연의 일부가 된다.

산 초입까지 내려온 낮은 구름이 억수로 쏟아 붓는 비에게 더 쏟아 부으라고 재촉한다.

나뭇잎을 간질이던 빗방울은 갖은 아양을 떠는 나뭇잎에게 올가즘을 느끼느냐고 묻는다.

불어난 계곡물은 이골 저골에서 세차게 부딪히며 쏟아져 내린다.

물 구경하기 좋은 날 판초를 뒤집어썼으니 아랫도리 젖은들 무슨 대수인가?

이런 날 사람이 없으니 완전한 자유인이 되어 좋고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나만의

행복을 독차지 할 수 있어 좋다.

 

문득 장화를 갖고 싶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집에 장화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돼지 똥 치울 때나 신는 시커먼 통 장화가 아닌

연녹색장화나 단추가 달린 반장화가 갖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화는 우리에게 사치일 뿐 시커먼 장화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그 장화를 광에서 몰래 꺼내 신고 동네 어귀 논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꼬에 서면

논물에 함께 쏟아져 내려오는 생이가래가 장화 발등을 휘돌아 쏜살같이 쓸려갔다.

내 발이 2개는 들어가고도 남는 커다란 장화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이상하게도 가슴이 뛰고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판초 우의를 쓰고 비 맞는 이 기분도 어쩌면 유년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인적 없는 산길!

나 혼자 운무를 헤치며 나아간다는 것이 경이롭기도 하고 마치 처녀지를 개척하는

탐험가인양 짜릿한 모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갑자기 하늘이 번쩍거리며 번개가 몰아치고 뇌성이 울린다.

이러다가 혹시나 벼락 맞는 것은 아닐까?엊그제 골프장에서 벼락 맞았다는 뉴스가 떠올라

두려운 생각이 스쳐 몸에 지닌 쇠붙이를 가늠해봤다.

바클, 스틱, 휴대폰, 안경.....

 

로또복권 당첨 확률이 벼락 맞을 확률보다 어렵다고 비유하는 걸 보면

까짓 벼락은 나와는 무관한 것일테이지만 신경이 쓰인다.

뾰족한 바위를 피해 사념에 잠겨 걸었다.

쉬엄 쉬엄 텅 빈 마당바위를 돌아내려와 약수터 배드민턴장에 들어섰다.

그 곳에는 중년의 여인이 비를 그으며 비를 구경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갔다오세요?”

“마당바위요”

멀리 다녀왔다며 감탄을 하는 그녀의 제스추어가 과장된 듯도 하다.

‘마당바위가 멀다면 연주대는 어쩌라고?’

휴대폰을 꺼내 동창녀석에게 문자를 만들고 나서 꽃밭에 시선을 돌렸다.

 

배드민턴 장 앞 꽃밭에는 아마릴리즈가 마치 에디슨 축음기 나발통처럼

커다랗게 꽃을 펴놓고는 빗소리에 자기의 소리가 묻힐까 목청겨루기를 하는 것만 같다.

해바라기를 닮은 루드베키아는 노란 이파리를 둥그렇게 펴고 꽃술은 진밤색 루즈를

바른 것처럼 요염하게 장맛비도 아랑곳 하지 않고 도발적으로 섹시미를 내뿜고 있다.

 

“저 꽃 이름이 뭐예요?”

“백합이요”

낯선 여인과 비 구경을 하는 것이 숨이 막힐 것만 같아 말을 걸었다.

아마릴리즈를 백합이라고 말하니 결코 틀린 얘기는 아니다.

 

“어디 사세요?”

“요 아래 연립이요”

‘이 동네 사는 것만으로 답변이 족할텐데 굳이 연립이라는 말까지 상세하게 할 건 뭐람?’

말끄러미 비오는 모습에 넋을 빼앗기다가 화제가 군대로 돌아갔다.

자식 둘을 군대 보낸 에미의 고통을 얘기하는 그녀의 옆모습에는 순간 삶에 지친 모습이

스쳐간다.

50이 넘은 그녀가 직장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는 자랑인지 푸념인지 모르지만

딴에는 자랑으로도 들린다.

그러고 보면 가진 자들은 군을 면제 받거나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보고......

대통령도, 총리도, 야당 대표도 군을 면제 받았다며 시국담 아닌 시국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경기가 좋다는데 나나 그녀나 좋은 걸 못 느끼겠다는 동질성을 확인하고 보니

그녀의 말 속에는 분노 속에 체념이 배어있다.

“하루 집 나서면 교통비만 최소 이천원에서 어떤 때는 오천원이예요”

내가 지금 낯선 이 여인과 무슨 생뚱하게도 화제꺼리가 없어 이러고 있는가?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그녀의 말이 빗소리와 섞여 귓속에서 빙빙 돌아나간다.

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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