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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야기들

전철에서 만난 처녀들!

나는 어느새 자리를 탐하는 나이가 되고 말았다.

전철을 탈 때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빈자리를 찾으려 신경을 쓴다.

그러다보니 요령이 생겨 전철이 진입하면 미리 빈자리를 찜해두고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빈자리로 다가간다.

 

여간해서는 경로석에 앉지 않지만 가끔 경로석에 앉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눈치가 보여 의자에 반쯤 엉덩이를 걸치고 등을 곧추세운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 노인이 오면 비켜줄 요량이다.

 

어쩌다 동창 녀석과 함께 전철을 타면 경로석에 앉아도 맘이 편하다.

그건 녀석의 머리가 훌렁 벗어졌기 때문이다.

녀석을 빙자하여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내기 위해서다.

 

자리 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자리를 잡는 것도 요령이다.

출퇴근시간에 전철을 이용할 때 몇 번째 칸에 타야하는지 요령이 생겼다.

낙성대에서 잠실로 가는 길이니 세 번째 칸을 타면 적당하다.

맨 앞 칸은 대부분 잠실까지 갈 사람들이 타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자리가 나지 않는다.

 

전철에 오르면 재빨리 안쪽으로 파고든다.

대부분 출입구 쪽은 붐비지만 안쪽에는 선반에 가방을 얹고 책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의자에 앉은 사람들 무릎 앞에 서면 운 좋게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어

비적거리며 들어가 보지만 무릎 앞에 서기는 그리 쉽지 않다.

 

오늘아침에는 운 좋게도 무릎 앞에 설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하고

선반에 가방을 올린 후 책을 꺼내 들었다.

이렇게 붐비는 시간에 헐한 공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횡재다.

내 앞에는 붉은 여행 가방이 세워져 있고 가방 주인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금방이라도 옆으로 넘어질 듯 졸고 있었다.

 

숨을 돌리고 책에 눈을 돌리고 보니 어디선가 악취가 풍긴다.

책을 덥고 주위를 살펴보니 가방주인의 하얀 옷이 땟국에 절어있다.

오버를 뒤집어 써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노숙을 시작한지 꽤 된 듯 옷소매가 번들번들하다.

그 번들거리는 소매 밖으로 나온 손으로 보아 여자가 분명하고

손의 탄력으로 보아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처녀임에 틀림없다,

옆에 앉은 청년은 그녀와 옷이 닿지 않도록 무가지로 경계를 치고 있었다.

 

젊은 처자가 왜 노숙을 할까?

노숙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직업이라는데 정말 그럴까?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보니 세상이 밉다.

청년이 내리자 내 옆에 섰던 아주머니가 잽싸게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도 내 발을 밟으며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태연히 앉는다.

 

난 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하며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코를 킁킁거리며 옆을 돌아보더니 그냥 비워진 자리가 아님을 눈치 챈

그녀는 다시 일어서기가 속보였던지 애써 태연한 모습으로 앞만 보고 꼿꼿이 앉아있다.

전철을 오르면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어젯밤 늦게 귀가하는 차량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모두들 귀를 이어폰으로 틀어막고 DMB 방송을 보거나 문자를 하느라 열중이다.

난 소설책을 꺼내 보다 말고 신천역에서 올라탄 젊은 처녀에게 눈길을 빼앗겼다,

그녀는 ‘오징어땅콩’이라는 과자봉지를 꺼내 포장을 뜯으려 애(?)를 쓰더니

잘 뜯기지 않은지 얼굴 표정을 이상하게 일그러뜨린다.

간신히(?) 포장을 뜯은 그녀는 오징어땅콩을 쉼 없이 먹어 댄다.

허기에 진 표정 같지는 않는데 정신분열증이 분명하다.

 

이제나 저제나 오징어땅콩이 바닥나기를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자니

드디어 바닥이 났는지 마치 현미경 들여다 보 듯 포장을 들여다본다.

그 누구와도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며 가끔 기묘한 웃음을 짓거나 기묘한 표정을 짓는다.

난 아예 책을 덮고 아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왜 정신분열증이 일어났을까?

실연당했을까?

 

사람 사는 것이 사람과 부대끼며 살 냄새 맡고 살아가는 거라지만 어쩐지 기분이 씁쓸하다.

사회가 너무 복잡하고 힘들어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는 것은 아닐까?

청년백수들이 늘어나면서 노숙하는 연령층도 낮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난은 나랏님도 어찌 할 수 없다지만 빈부양극화가 너무 심해

자칫 몇% 가진 자들을 위해 다수의 못가진자들이 눈을 흘기는 정도가

이제는 도를 넘어서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청년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기계는 없을까?

한사람이 100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빌게이츠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왜 나오지 않는 걸까?

젊은이들의 창의력을 빼앗아버리고 달달 외우는 암기기계를 만든 것 또한

한 원인이 아닐까?

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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