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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56. 참새 잡던밤.

 

산그늘이 내려오자 금세 저녁이 되고 질척대던 고샅길도 땡땡 얼기 시작합니다.

큰집에 들어서니 사촌형이 마당가에 쌓인 나무를 행랑채로 옮기며 나를 반깁니다.

가마니를 뜯어 발을 쳐 놓은 외양간에는 무쇠 가마솥이 걸려 있습니다.

발을 젖히고 들어가니 등허리에 가마니때기를 두른 암소가 눈을 껌벅이며

어두컴컴한 외양간에서 혼자 되새김질을 하고 있습니다.

난 소가 뿔로 받을까 두려워 멈칫거립니다만 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쑥 들어갑니다.


“삼식아! 불쏘시개 하게 가리나무(1) 가져와!”

내가 마른 솔잎이 쌓인 허청으로 다가가자 파란불이 나를 노려봅니다.

섬뜩 놀라 물러서서 자세히 보니 누렁이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얼음이 둥둥 뜬 맹물을 가마솥에 가득 붓고 불쏘시개에 불을 붙이기 시작합니다.

마른 솔잎에 불을 붙이니 첨에는 힘없던 발간 불이 힘을 받기 시작합니다.

생 솔갱이(2)를 넣으니 하얀 연기가 아궁이 밖으로 밀려 나오기 시작합니다.

난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형은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바람을 불어댑니다.

군불을 때는 형 옆에 앉으니 거적때기 밖에서 달리기하던 찬바람도 잦아든 듯합니다.

생 솔가지는 피익 피익 송진을 태우며 우리 얼굴을 발갛게 물들입니다.

소나무를 베어내면 순사에게 잡혀가는데 걱정도 안 되나봅니다.

아궁이 속에서 이글거리는 분홍색 숯덩이들이 우리를 술 먹은 사람처럼 만듭니다.


질그릇 화로에 숯불을 담아 썰렁한 방으로 들어가니 고구마가 가득 찬 수숫대 발 옆으로

생쥐가 후다닥 돌아갑니다.

쾌쾌한 흙냄새가 방안을 한바퀴 돌더니 이내 잠잠해집니다.


밤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형의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형은 동네 어른들과 인사를 트고 지낼 정도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새끼줄을 들고 뒤따르는 깜깜한 골목길에 손전등 불이 춤을 춥니다.

불빛을 보며 걸어가지만 자꾸 돌부리에 발이 걸리고 누군가 뒤에서 낚아챌 것만 같아

무섭습니다.

내가 손전등을 들고 앞서가면 좋은데 형은 줄 생각을 않습니다.


“사다리 꽉 잡아!”

형은 능숙한 솜씨로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 추녀 밑에 손을 푹 집어넣습니다.

"짹!"

참새 두 마리가 형의 손에 쥐어져 있습니다.

형은 새끼줄을 틀어 참새목을 건 다음 나에게 줍니다.

가만히 손으로 만져보니 아직 온기가 남아 따뜻합니다.


다시 이웃집 사립문을 밀자 깡통이 유난히 크게 소리를 냅니다.

"누구여?“

봉창에 흔들리던 그림자가 우리 쪽을 바라봅니다.

"정동양반! 나여! 새잡으러 왔어!"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형이 아는 채하자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봉창이 닫힙니다.


숨을 죽이고 손전등 불빛을 따라가자 형은 또 두 마리를 잡아냅니다.

참새는 한번에 꼭 두 마리씩 잡혀 나오는데 아마 친구인가 봅니다.

참새가 들락거렸던 추녀에 손전등을 비추면 반들반들합니다.


새끼줄에 꿰인 참새가 10마리도 넘습니다.

볼이 터질 듯 추운 밤을 뒤로하고 행랑방으로 들어오니 따뜻한 공기에 얼굴이 가렵습니다.

새끼줄에는 적갈색 참새들이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일렬로 매달려 있습니다.

형이 참새를 통째로 화롯불 속에 넣고 재를 덮자 털이 타는 냄새가 온 방안으로

퍼져 나갑니다.

언젠가 졸다가 등잔불에 머리카락 그슬릴 때처럼 냄새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얼마 있어 참새를 끄집어내자 타다말고 녹아 뭉친 털이 마치 까만 숯덩이 같습니다.

형이 군고구마 껍질 벗기 듯 털을 벗기니 옷을 활딱 벗은 참새의 몸이 빨갛습니다.

나는 왕소금을 숟가락으로 잘게 부수며 형의 손만 바라보았습니다.

목을 떼어내고 가슴을 벌린 후 석쇠에 올려놓으니 그제야 온방이 구수한 냄새로

그득합니다.


형은 참새 허벅다리를 잘라 소금에 찍어 건네줍니다만 왠지 먹을 자신이 없습니다.

머뭇거리며 형을 보니 형은 갈비뼈까지 꼭꼭 씹어 맛있게 먹습니다.

나도 용기를 내어 먹어보니 쇠고기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맛이 고소합니다.

‘네 고기 열점과 내고기 한점을 안 바꾼다!’

참새가 쇠뿔에 앉아 재잘댄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도 같습니다.


형은 고구마 발 뒤에 있는 막소주를 꺼내 입을 대고 한 모금 마시더니 크으 소리를 냅니다.

"삼식아! 너도 한 모금 할래?"

난 언젠가 벼 베는 날 막걸리를 마시고 혼났던 생각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흔들며

형의 입만 바라보았습니다.


난 수숫대 사이로 삐죽 내민 고구마를 꺼내 화롯불 속에 묻었습니다.

"낯 설은 타관 땅에 그날 밤 그 처녀가...~"

술을 마시면 꼭 노래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형의 유행가 속에 겨울밤이 깊어갑니다.


1) 가리나무 : 갈퀴로 긁어모은 땔나무

2) 솔갱이 : 솔가지의 남쪽 방언


참새는 대부분 사람이 사는 인가에 둥지를 갖고 있다.  산새들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않고 산속에 사는 것과는 반대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초가집이 대부분이던 시절에는 추녀 밑이나 돼지우리에 쳐놓은 마름 속에서 겨울을 나곤 하여 밤중에 잠든 참새를 손으로 잡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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