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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56. 못치기

 

초가지붕 추녀에 우리 키 만큼 기다란 고드름이 매달렸습니다.

마루에 누워 추녀를 보니 마치 대밭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듭니다.

측간에 매달린 고드름은 누런색갈입니다.

요 며칠 춥다가 봄날처럼 따뜻한 게 자연시간에 배운 삼한사온이 꼭 맞나봅니다.


‘차르락!’

고드름이 통째로 떨어져 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또닥또닥 떨어진 낙수가

고랑을 이루며 흘러갑니다.

마당 한쪽 귀퉁이에 작은 동산처럼 쌓인 눈 더미 옆에 코가 녹아내린 눈사람이

못난이가 되어 얼굴을 찡그리고 서있습니다.


“김상! 계시오?”

구장(1)이 종이뭉치를 들고 사립문 풍경을 울리며 들어옵니다.

“아부지 없어라우!”

일어나 얼버무리자 알 수없는 종이에 인주를 묻혀 도장을 꾹 찍어 기둥의 못에 꽂아놓고

가십니다.

새끼 밴 백구 녀석도 토방에서 내 고무신을 깔고 무거운 배를 내놓고 누워 있다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납니다.

구장이 밟아 흙이 뒤집어진 마당에서는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릅니다.


근데 춘식이와 지만이가 나를 부르러 오지 않습니다.

항상 내가 먼저 놀자고 해야 나오는 녀석들이 얄밉기 그지없습니다.

실은 어제 못치기 하다 토라져 먼저 집에 온 내가 그들에게 놀자고 말하기가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닙니다.


난 보물상자가 있는 뒤란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무래도 내가먼저 놀자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보물상자는 부서진 사과 상자로 만든 조그마한 상자를 말합니다.

그 속에는 딱지, 구슬, 자치기, 못은 물론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습니다.


못을 꺼내 세어보니 큰 못이 3개  작은 못이 2개입니다.

큰못은 손가락이 헐지 않도록 대가리를 돌로 짓이겨 납작하게 만들었고

땅에 잘 꼽히도록 끝은 뾰족하게 갈아 두었습니다.

“춘식아~!”

춘식이네 집으로 달려가니 춘식이가 뒷간에서 대답을 합니다.

“얼렁 똥 누고 나와! 지만이랑 못 치고 있을께!”

어느새 지만이도 양지바른 돌담 옆에서 못 치기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춘식이가 허리춤을 말아 올리며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옵니다.

“오늘은 꼴아도(2) 꼴기(3) 없기다 잉!”

춘식이의 말에 기가 죽습니다만 나는 어제 잃은 대못 한 개를 되찾기 위해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그동안 못 치기를 너무 많이 하여 엄지와 검지 손가락에 물집이 여러 번 생겼다

가라앉았습니다.


어제 잃은 못을 되찾고자 힘 있게 못을 쳤습니다만 오히려 큰 못을 다 잃고

그 대신 작은 못만 여러 개 땄습니다.

작은 못은 아무리 많아도 큰못 한 개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제 잃은 것까지 합하면 큰못을 전부 4개 잃은 것입니다.

“성! 밥 묵으래!”

“응? 엉!”

점심이고 나발이고 울고 싶어졌는데 동생이 부릅니다.

이대로 점심 먹으로 가면 큰 못은 영원히 춘식이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춘식아! 작은 못 전부 다 줄게 큰 못 내놔!”

“안돼!”

내가 자존심을 다 버리고 사정을 합니다만 안 된다고 잡아 땝니다.

“그럼 앞으로 너하고 안 놀아!”

최후의 무기를 빼들자 아예 지만이것도 돌려주는 춘식이가 너무 고맙습니다.

“밥 묵고 또 놀자!”

난 벙긋 입이 벌어져 날듯이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마당 볿지 말고 돌아서 와라 잉!”

집에 들어오니 툇마루에서 점심을 드시던 아버지가 한 말씀 하십니다.

그렇잖아도 아까 구장이 마당을 밟아 흙이 뒤집어졌기 때문입니다.

점심밥은 뜨거운 물에 팔팔 끓인 물밥입니다.

배추김치를 죽죽 찢어 숟갈위에 얹어서 먹으니 온몸이 더워지고 콧잔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백구가 입맛을 다시며 마루 위를 쳐다봅니다만 줄 것이 없습니다.


짐승들은 점심을 먹이지 않으니 백구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돼지에게는 관대합니다.

“삼식아! 돼야지 꾸정물(4) 좀 주고와라!”

살얼음이 낀 구시(5)에 구정물을 한바가지 퍼다 주자 콧바람을 불며 건더기를 찾기

시작합니다만 건더기가 있을 리 없습니다.

죽저(6) 가마니에서 보리 죽저를 한 보시기 퍼주자 가라앉을까 두려운 듯 덥석덥석

퍼먹더니 구정물을 쭈욱쭈욱 빨아 먹습니다.

역시 돼지는 돼지입니다.


1) 구장 : 면장, 리장, 구장 순으로 도시에서의 통.반장과 같은 체계

2) 꼴다 : 노름 따위에서 돈을 잃는 것으로 전라도 사투리

3) 꼴다 : 토라지거나 삐지는 것의 전라도 방언

4) 꾸정물 : 오수 즉 구정물의 사투리

5) 구시 : 짐승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으로 구유기 표준말 임

6) 죽저 : 쌀이나 보리방아를 찧을 때 나오는 고운 분말로 ‘겨‘가 표준말임


** 못 치기는 서있는 상대의 못을 넘어뜨리는 놀이이다. 또한 넘어진 못은 최대한 가까이 붙여 움직이거나 땡그랑 소리가 나도록 하는 놀이다. 물론 내 못은 반드시 서 있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넘어진 상대의 못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내 못의 길이 범위 내에 들어오면 따먹는 놀이이다. 마치 골프에서 OK를 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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