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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55. 소년시절의 꿈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눈이 부십니다.

안산과 뒷산에도 그리고 들판도 온통 눈꽃 세상입니다.

측간 지붕에 쌓인 눈이 이불처럼 따뜻해 보입니다.

돼지우리 시렁에서 자고 있던 닭이 아침을 알립니다만 돼지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뜨거운 물을 퍼와 세수를 하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돼지가 일어납니다.

고양이 세수하듯 콧잔등만 씻고 마당에 물을 뿌리자 닭들이 시렁에서 뛰어 내려옵니다.

세수 대야가 앉아있던 자리가 마치 전 지저 놓은 것처럼 동그랗게 눈이 녹아있습니다.


“밥 안 묵으면 안 데리고 간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설레발을 치니 아버지가 지천(1)을 하십니다.

밤색 고리땡(2) 바지에 다비(3)를 신고 식경(4)을 보니 어제의 내가 아닙니다.

검정색 무명옷에 꿰맨 양말을 신은 못생긴 얼굴이 제법 폼이 납니다.


“살살 가그라!”

새신을 신고 신작로를 달리는 동생의 발자국을 보니 갓 뽑은 가래떡 같습니다.

“어디 가신게라우?”

차부에 서있던 동네 어른들이 담배를 피우며 아버지께 인사를 합니다.

“예! 진지 잡수셨소? 도암 좀 들어가요! 근디 차 온다지라우?”

“글씨! 잘 몰겄소 잉! 오겄지라우”


큰집으로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에 딱 두 번 있습니다.

저녁에 들어가는 버스는 큰집 동네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나옵니다.

혹시 버스가 안 들어올까 걱정되어 황새 모가지 빼듯 멀리 산모퉁이를 바라봅니다만

빗자루처럼 서있는 포플러 가로수가 이따금씩 벌벌 떨며 눈을 털어 낼뿐 기척이 없습니다.


“아따! 차 온다고 헙디여? 안 온다고 헙디여?”

기다리다 지친 윗동네 아저씨가 물어보자 그제야 차부 아제가 전화기를 돌립니다.

검정색 전화기도 추운지 아제의 손에서 앙탈을 부립니다.

“여보시오! 아! 거! 뭣이냐? 버스 출발 했소? 엉! 온다고라우?”

길이 미끄러워 안 올까 조마조마하던 차에 가슴이 가라않고 정말 다행입니다.


큰집에는 항상 우리 편을 들어 주시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매 맞을 일이 있을 때도 할머니만 계시면 안심입니다.

아버지도 꼼짝을 못하시니 우리 할머니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많은 친척들이 모여 살고 있는 큰집 동네에는 당숙, 종조할머니, 큰아버지,

심지어는 나보다 어린 삼촌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사촌 형과 누나가 있어 형과 누나가 없는 나에게는 짱입니다.


기다리다 지친 우리는 반들반들한 신작로로 나와 미끄럼을 타며 눈싸움을 시작 했습니다.

꽁꽁 뭉친 눈을 들고 달려가자 동생이 깔깔 웃으며 차부 안으로 도망갑니다.

“어따! 차거라!”

힘껏 눈을 던지자 아버지 옆에 서계신 어른 뒷목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습니다.

얼른 아버지 눈치를 살피자 아버지가 민망한 표정으로 우리를 흘겨봅니다.

혹시 안 데리고 가실까봐 다숙이고(5) 앉아 산모퉁이를 바라보며 버스가 올 때를 

점 쳐보지만 번번이 허탕입니다.


“차온다!”

누군가의 말에 산모퉁이를 바라보니 노란버스가 엉금엉금 기어 나옵니다.

너무나 반가워 신작로로 뛰어 나가다 그만 꽈당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엉덩이가 아프지만 안 아픈 척하고 다시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으나 모른 척 하십니다.

조용하던 차부로 부릉 부릉 비틀거리며 조심스럽게 버스가 다가옵니다.


“오라이!” 

버스에 오르자 차장 누나가 낡은 문을 덜커덩 닫더니 손바닥으로 문을 두드립니다.

눈 위로 기어가듯 달리는 버스가 마치 붕붕 떠가는 것 같습니다.

난 운전사 앞쪽 엔진 덮게 위에 앉았습니다.

우리 집 안방 아랫목처럼 따뜻하기는 한데 다쳤던 엉덩이가 달달거리는 바람에

간지럽습니다.

차창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지붕들이 내 발 아래 있는 것처럼 낯설어 보입니다.

머릿기름을 잔뜩 바른 청년들과 테 두른 모자를 쓴 어른들이 시끄럽게 얘기를 하십니다.


차장 누나는 버스요금을 깎아 달라는 할아버지와 말씨름이 한창입니다. 

옷 벗은 포플러 가로수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가 뒤로 달음박질해 도망갑니다.

운전사는 언제나 아무리 먼 길도 앉아서 가니 부러울 게 없습니다.

운전사는 재주가 엄청 좋아 길옆 꼬랑(6)으로 빠질 것만 같은데도 구불구불한 길을

요리저리 돌아나갑니다.

나도 커서 버스 운전사 아저씨가 되고 싶습니다.


1) 지천 : 지청구의 사투리

2) 고리땡 : 누빈 것처럼 골이 지게 짠, 우단과 비슷한 옷감으로 코르덴의 잘못된 발음

3) 다비 : 양말의 일본 말

4) 식경 : 거울의 전라도 사투리

5) 다숙이다 :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다

6) 꼬랑 : 도랑의 남쪽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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