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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49. 새앙 지내던 날!

 

가을걷이와 월동준비가 모두 끝나 분주했던 시골 마을이 조용해졌습니다.

미처 따지 못한 감들이 서리를 맞아 붉은 볼에 분을 바른 채 떨고 있고

갓 삶아 마당에 널어 논 고구마 줄기에서 하얀 김이 올라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낯선 친척들이 하얀 한복 두루마기를 걸치고 집으로 모여듭니다.


오늘은 새앙(1) 지내는 날입니다.

난 아직 새앙지내는 곳을 한번도 따라가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해거름 판에 떡과 과일을 짚으로 엮어 싸오신 것만 먹었을 뿐입니다.

오늘은 꼭 따라가 보리라 작정하고 시키지 않은 마당도 쓸었습니다.


“어무니! 나도 따라 갈께~!”

“먼 소리여? 학교는?”

응석을 부리며 어머니의 담 말을 기다렸으나 뻔한 말씀을 하십니다.

사실 아직까지 학교는 한번도 결석한 적이 없었거든요.

오늘 같은 날 사촌형과 친척 어르신들의 뒤를 따라 산길을 걸어가면

소풍 가는 것보다 더 즐거울 텐데 맥이 빠집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하지만 하루 종일 새앙지내는 모습만 어른거립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산소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춘식이도 지만이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꼬막 껍질이 없는 걸 보니 아직 새앙을 지내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먼 산소부터 새앙을 지내느라 늦어진 모양입니다.


우리는 산마루를 쳐다보며 친척들이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습니다.

앞산에서도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어른들이 새앙을 지내고 있습니다.

왜 어떤 때는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또 어떤 때는 새앙을 지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외딴집에 있는 덕배 아버지가 바지게(2)에 짐을 가득 지고 올라오십니다.

작대기를 지팡이 삼아 힘들게 올라오시더니 우리 앞에 지게를 내리십니다.

알고 보니 우리 산소에 제사음식을 지고 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산지기인 덕배 아버지가 해마다 음식을 만들어 오시니 정말로 고마운 분입니다.


지게 위에는 밤색 나무그릇 외에 떡과 전 그리고 유자도 보입니다.

그런데 친척들은 왜 이렇게 안 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이 지나자 산등성이에서 하나둘 친척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큰아버지도 삼촌도 그리고 사촌도 당숙도 보입니다.

난 재주를 한바퀴 넘고 싶을 만큼 반갑고 기분이 좋아 졌습니다.


제일 어른이신 먼 친척 할아버지가 뒷짐을 지고 서서 제상 차리는 것을 지시하십니다.

떡, 꼬막, 막걸리. 유자, 곶감 등을 차려 놓으니 정말 떡 벌어진 잔칫상입니다.

친척들이 모두 엎드려 절을 하시는 가장자리에서 우리들도 절을 합니다만

솔직히 절에는 관심도 없습니다.

고개를 들고 일어서려니 친척 들이 아직도 엎드려 있습니다.

절도 왜 이렇게 천천히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절을 하며 곁눈으로 당숙을 쳐다보니 당숙이 눈을 감고 엎드려 있습니다.

나도 얼른 눈을 감았습니다.

“삼식아! 일어나라!”

고개를 돌려보니 모두들 서 계시며 빙긋이 웃습니다.


친척들이 정종을 드시고 안주로 꼬막을 맛있게 잡수시는 것을 보니

침이 물처럼 목구멍으로 넘어갑니다.

우리는 떡을 한개 씩 나눠들고 오물거리며 상석(3) 옆 잔디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자

까마귀 떼들이 마치 수많은 점을 찍어 놓은 듯 날아가고 있습니다.

친척들이 남은 음식을 나누어 짚으로 싸서 묶기 시작하십니다.


난 딱 한개 있는 유자만 쳐다보았습니다.

아직 먹어본 적이 없는 유자 겉모습이 마치 얼금뱅이를 닮았습니다.

“어이! 그거! 유자는 삼식이 줘!”

제일 어른인 할아버지에게 애써 눈을 맞춘 보람이 있습니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고 냄새를 맡아보니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긋한 냄새가 납니다.

지만이와 춘식이에게도 한번씩 맡아보게 하고는 주머니에 넣자 주머니가 불룩

튀어 나옵니다.

난 그 유자가 새까맣게 마를 때까지 두고두고 냄새를 맡았습니다.


1)새앙 : 시향 또는 시제의 사투리로 봄 가을에 5대조 이상 조상들께 제를 지내는 것

2)바지게 : 싸리나무를 엮어 만든 발채로 지게 위에 얹어 거름을 내거나 작은 믈건 들을

          져나르는 데 사용

3)상석 : 제사 음식을 진설하기 위해 묘소 앞에 놓은 평평한 돌


** 시제는 가을걷이가 끝난 후 음력 10월 상달이나 봄에 조상님들을 찾아 제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지방에 따라 5대조 할아버지부터는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바깥제사(시제)를 모시는 풍습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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