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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47. 단풍잎 주으러 간 날

단풍잎

“어무니! 어~무니!”
툇마루에 책보를 집어 던지고 어머니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습니다.
뒤란으로 달려가 봐도 장독대 옆의 코스모스만 살랑거릴 뿐 조용합니다.
어머니가 없는 텅 빈 이런 날 제일 성질이 납니다.
살강을 뒤져 밥을 찾았으나 밥도 안보입니다.

낑낑거리며 부뚜막에 걸린 가마솥 뚜껑을 열어보니 초승달처럼 조간 난
노란 호박이 단내를 확 풍기며 늘어져 있습니다.
툇마루에 나와 책보를 열고 자연책을 뒤적이며 호박을 먹고 있으니
닭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봅니다.
호박씨를 씹어 알갱이를 먹고 뱉어내니 쪼르르 달려가서 쪼아 먹습니다.

자연 책 속에는 가을 단풍잎이 울긋불긋 그려져 있습니다.
사립문에 매달린 깡통이 달랑 달랑 소리를 내며 춘식이와 지만이를 반깁니다.
“호박이네!?”
녀석들은 마치 자기 부엌이나 되는 것처럼 살강에서 떠억 숟가락을 들고 달려듭니다.
밥을 먹고 왔을 텐데 뱃속에 거지 들었나 봅니다.

지만이가 코를 훌쩍거리며 국물만 계속해서 떠먹습니다.
사실 호박 보다는 사카린을 섞어 우러난 다디단 국물이 더 맛있거든요.
녀석의 코가 양재기에 떨어질 듯 말듯 조마조마합니다.
“야! 지만아 더 퍼와!”
남은 국물을 주욱 마신다음 빈 양재기를 건네주며 춘식이에게 찡긋 웃었습니다.

우리는 단풍잎을 수집하는 자연 숙제를 하기위해 뒤란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느새 감나무가 옷을 다 벗고 붉은 속살을 내놓은 채 수줍게 얼굴을 붉히고 있습니다.
붉은 반점과 노란 반점으로 얼룩이 든 감나무 잎을 주워들고 자세히 바라보니
지난여름 짙푸른 색깔로 씽씽하게 힘자랑 했던 찬란한 패기는 간곳없고
초로의 늙은이처럼 힘없이 속삭입니다.
‘추워! 어여 들어가 겨울 준비해!‘

우리는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자연책에 나오는 다섯 손가락처럼 쪽진 붉은 단풍잎이 우리 동네에는 없습니다.
닭 벼슬처럼 작은 정금나무 이파리가 그래도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맹감나무에 빨갛게 매달린 열매들을 주머니에 넣고 우리가 항상 즐겨 앉는 바위에
올랐습니다.

멀리 마을에는 감들이 도화지에 붉은 점을 찍어 놓은 듯 매달려 있고
지붕위의 하얀 박들이 허연 배를 내놓고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항상 이맘때만 되면 너무 조용합니다.
몇 점 바람에 허연 억새가 흔들거리는 산도 텅 빈 하늘도 우리 맘을 울적하게 만드는
묘한 심술이 있습니다.

주머니 속의 맹감을 꺼내 오물거리며 일어서려니 울타리 샛길로 오순이와 은희가
도란거리며 올라옵니다.
그들도 자연 숙제 하러 온 모양입니다.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얼어붙는 듯 했습니다.
예쁜 은희가 구차한 우리 동네까지 놀러온 것이 반갑기도 하지만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난 어느새 얼굴이 발개졌습니다.

춘식이도 지만이도 은희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만큼 좋아하지는 않나 봅니다.
가끔 학교에서 고무줄 놀이하는 은희를 골려 주는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난 얼른 말없이 일어나 자리를 비워주었습니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 은희가 앉으면 내 마음이 은희에게 전해질것만 같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자리에 은희가 앉는 게 아니고 오순이가 터억 앉습니다.
은희가 전학 온 뒤로 눈에 띄게 쌀쌀맞게 굴어왔던 오순이가 오늘은 정말 밉습니다.

“야! 우리 이제 가자!”
난 애써 태연한 척 하며 앞장서는데 녀석들이 따라오질 않습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울고 싶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난 앞으로 녀석들과 절대 안 놀아 줄 거라고 다짐을 하며 마당에 들어서자
어머니는 콩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너! 쌈했냐?”
골이 난 내 얼굴을 보며 어머니가 묻습니다만 물으시는 것조차 화가 납니다.
어머니가 두들기는 콩깍지에서 콩알이 마루까지 튀어 옵니다.

** 자연 숙제에서 단풍잎 줍기가 있었다. 가을날은 어른들이 들로 나가 계시기 때문에 마을이 조용해서 쓸쓸한 생각이 들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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