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이 영글어 갑니다.
누더기 옷을 걸친 허수아비들이 하나 둘 논 가운데서 쓸쓸하게 웃습니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허수아비는 멀리서 보면 정말로 김매는 아저씨 같습니다.
수많은 참새 떼들이 허수아비를 보고도 이 논 저 논으로 우르르 몰려다닙니다.
나와 동생은 대나무 딱딱이를 들고 논으로 향했습니다.
대나무를 절반으로 쪼개어 손잡이를 만들어 흔들면 별 힘 들이지 않고도 날카롭게
소리를 내는 딱딱이가 참새 쫓기에는 안성맞춤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처음 발명한거라고 춘식이한테 자랑하면 춘식이도 아무 말 못합니다.
“얼렁 와!”
수수와 옥수수를 싼 보자기를 들고 뒤따르는 동생이 자꾸 뒤쳐집니다.
천수답인 다락논의 나락들이 막 고개를 숙이기 시작합니다.
한 알을 따서 입에 넣으니 뜨물처럼 하얀 물이 비릿하게 입안에 터집니다.
“후여~! 후여~!”
멀리 우리 논 너머에서 마을 할머님이 참새를 쫒고 계십니다.
벌써 우리 논에는 새들이 몰려와 나락을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우~~ 우~~!”
나와 동생은 냇가에서 고기 잡을 때처럼 발을 구르며 달려가니 수많은 새들이
하늘로 올라 멀리 다른 논으로 날아가 앉습니다.
높은 논둑에 앉아 딱딱이를 꺼내들고 앉으니 초가을 풀냄새가 향긋하게 코끝을 스칩니다.
우리논의 허수아비는 바보처럼 새를 쫓을 줄도 모릅니다.
이웃집 논에 있는 허수아비는 깡통이 달려있어 가끔 소리를 질러대니 새가 두려워합니다.
이 논 저 논에서 새들을 쫓자 참새 떼들이 우리를 놀리 듯 이리저리 몰려다닙니다.
나와 동생은 오른손으로 딲딲이를 흔들며 목이 터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후~여! 후~우여!”
새들이 앉으려다 말고 멀리 달아납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벼 포기에 맺혔던 이슬도 어느새 몸을 감춥니다.
슬그머니 배가 고파진 우리가 보자기를 열자 살진 수수가 자주 빛 눈꺼풀을 벌리고
검정 알이 군데군데 박힌 옥수수 옆에서 졸고 있습니다.
점심으로 옥수수를 먹고 무료하게 앉아 있자니 스르르 잠이 옵니다.
동생의 눈은 이미 꿈나라로 들어가는 중입니다.
동생을 논두렁에 눕혀 놓고 뒷산을 바라보니 억새꽃이 하얗게 흩날립니다.
이제 새들도 더 이상 날아오지 않는 것이 배가 부른 모양입니다.
잠시 시간이 멈춰버린 듯 조용합니다.
“꾸륵! 꾸륵”
이따금 위 논에서 개구리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철벅 철벅 뜁니다.
아마 벼 포기에 붙어있는 먹이를 낚아채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내 눈도 천근만근 무거워져 논두렁에 눕자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스라이 새들이 날아옵니다.
딱딱이를 흔들어 대지만 이상하게 전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갑자기 개구리 뛰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립니다.
놀라 눈을 뜨니 동생이 논고랑으로 굴러 떨어져서 울상이 되어있습니다.
왼쪽어깨에서 다리까지 진흙탕 범벅이 되어있습니다.
동생을 일으키려다가 나도 그만 미끄러져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엉덩이가 진흙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바보같이! 잠도 똑바로 못자?”
맑은 물에 씻으면 오후에는 마르니 걱정 없습니다만 벼 포기가 쓰러진 것이 걱정입니다.
벼 포기를 일으켜 세우고 동생을 씻기며 엉덩짝을 한 대 두들겨 팼습니다.
동생은 입이 부어 말도 않고 내가 시킨 데로 몸을 맡깁니다.
** 애써 지은 농사를 지키기 위해 참새 쫓기가 일과였다. 우리는 대나무를 절반으로 쪼개어 만든 딱딱이를 흔들며 새 쫓기에 나서곤 했지만 무리지어 날아온 참새들은 덜 익은 나락을 망쳐놓기 일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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