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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38. 활동사진 보던 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이른 저녁을 먹고 춘식이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춘식이네가 아직 덕석위에서 저녁을 먹고 있습니다.

어느새 지만이도 바쁘게 뛰어 나옵니다.

마을 당산나무에 매달린 스피커도 신이 났습니다.


“주민 여러분! 이따 야달시(8시) 까정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민 여러분에게 틀어주는 영하는 ‘소만국경’입니다.”

동네 이장이 마이크 잡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열변을 토합니다.

한번만 해도 알아듣는데 꼭 찢어지는 소리로 방송을 해댑니다.


오늘은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활동사진을 틀어주는 날입니다.

마을 앞 논둑에 서서 어른들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만 늑장들을 피웁니다.

영화가 시작될까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우리끼리 가고 싶지만 상여집에서 귀신이 나올까봐 무서워 머뭇거리고 기다렸습니다.

얼마 전 밤에도 우리들이 놀고 있는데 그 집에서 파란 불이 왔다 갔다 했거든요.


하늘을 보니 북쪽 하늘에서 마른번개가 칩니다.

비가 오지 않은 마른하늘에서 소리도 안내며 번쩍 번쩍 번개를 치는 것은

나락이 잘 익으라고 치는 번개라고 합니다.


담뱃불이 훤하게 깜박이며 어른들이 나오자 우리는 그 뒤를 따랐습니다.

난 무서워서 맨 뒤에 서는 것을 싫어합니다.

뒤에서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당길 것 같아 똥꼬가 근지럽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담배연기가 코 속으로 스며들어 맵지만 멀리 떨어지지 못하고

콜록 콜록 기침을 하며 행여나 놓칠세라 앞만 보고 걸어갔습니다.

상여집이 가까워 오자 등골이 오싹해 옵니다.

대 낮에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거든요.


“따따따 따따따 둥근 찬으로~  ”

우리들이 일부러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어른들은 자꾸 한자리 더하라고 재촉합니다.

싫지만 혹시나 우릴 떼어 놓고 갈까봐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린음악대’도 부르고 ‘학교 종’도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가득 찬 운동장에는 어느새 알데미 녀석들이 뛰어다니고 두런두런 시끄럽습니다.

영화를 틀어주는 아저씨가 검정 안경을 쓰고 어깨를 으쓱하며 왔다 갔다합니다. 

나도 크면 영화를 틀어주는 아저씨가 되고 싶습니다.

영사기가 다르륵 소리를 내며 당목 포장위에 빛을 쏘기 시작합니다.

흑백 활동사진이 움직이자 화면에는 비 오듯 빗금이 움직입니다.


일본 놈과 독립군이 싸우는 영화입니다.

독립군이 말을 타고 일본 놈을 때려눕히기도 합니다만 여자 독립군이

일본 놈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얼굴이 엄니처럼 예쁜 여자 독립군이 죽을까 걱정됩니다.

싸움 잘하는 남자 독립군이 달려옵니다만 말이 너무 더디게 달려 가슴이 조마조마합니다.


다행히 남자 독립군이 일본 놈을 죽이자 우리는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선선한 늦여름 밤이 깊어가지만 우리 눈은 초롱초롱 화면에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 60년대 우리는 계몽 영화나 반공 영화를 보았다. 물론 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하므로 별도의 돈을 내지는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자동차 극장과 같이 열린 공간에서 다같이 울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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