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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야기들

주렁 막대기

 

5월의 연초록 이파리가 어머니의 저고리 끈처럼 팔락이던 날.

절뚝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설악산 비룡폭포로 향했다.

어버이날인 오늘 내가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방법이 고작 이것일까?


앞서가시던 어머니가 매표소 앞에서 항아리에 꽂힌 등산용 스틱을 만지작거린다.

‘어머니! 주렁(1) 막대기 살까?“

”아녀! 괜찮어! 집에도 있어!“

살까 말까 망설이다 관광지라 바가지 씌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폭포로 가는 길목 곳곳에는 자연학습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난 설명문을 유심히 읽으며 산기운에 취해들기 시작했다.

참나무 종류를 설명해둔 곳에서 발을 멈추고 해찰(2)을 하며 뒤쳐져 걸었다.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모두가 참나무 과에 속한단다.

이제 갓 싹을 돋은 연초록 신갈나무 잎이 마치 홍어회 떠 놓은 듯 하다.

왜 하필이면 막걸리 안주로 제격인 홍어가 떠오를까?

혼자 픽 웃으며 발길을 돌리니 나무막대기를 짚고 가던 어머니가

연신 뒤 돌아보며 나를 기다린다.

아까 주렁 막대기를 살 걸 후회가 되었다.


‘당신도 참! 낼 모래 환갑 돌아올 자식 잃어버릴까 걱정되시나?

며느리들과 말벗하며 가면 되지!‘

잰 걸음으로 다가가자 안심한 듯 다시 발걸음을 떼어 놓으신다.

며느리 보다 당신 뱃속으로 낳은 자식과 말동무 하는 것이 더 그리운 것일까?


아까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카우보이 등산모를 멋들어지게 쓴 할아버지가

혼자서 배낭을 메고 걸어가며 관심 있게 우리를 쳐다보신다.

나도 나이 들어 저 할아버지처럼 설악산까지 혼자 등산 올 수가 있을까?

근데 할아버지는 집이 강릉일까? 속초일까?

할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어머니 손을 잡았다.


거친 손바닥 너머에서 즐거워하는 모습이 전해오자 울컥 불쌍한 생각이 든다.

혹 며느리한테 빼앗긴 자식을 되찾은 기쁨이 든 건 아닐까?

다람쥐 녀석이 바위 위에서 고개를 길게 빼고 우리를 본다.

어머니 손을 잡고 가는 모습이 신기하여 고개를 늘여 빼는 것일까?


”어머니! 다리 아프면 여그서 쉬어! 우리 얼른 갔다 올께!“

“아녀! 좀더 가다가 쉴껴!”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쉬면 좋을 텐데 기어코 따라온다며 고집을 피울까?

배낭을 챙기자 먼저 앞서 걷다 말고 아까의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눈다.


”워따! 먼 요런 것을 준다요? 고맙소 잉!“

도대체 뭘 줬기에 고마울까? .

“어머니! 뭐여?‘

어머니 손에는 죽은 나무막대기 대신 톱으로 다듬은 멋있는 막대가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가 주렁 막대기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선물 하신 것이다.

혹시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마음에 두는 것은 아닐까?

쿡 웃으며 발을 떼니 느닷없이 휴대폰이 울린다.


차번호가 맞느냐며 내차가 비상등을 깜박거리고 있단다.

황급히 돌아서서 내려가자 할아버지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허겁지겁 되돌아 내려오니 어머니가 섭섭한 눈치다.


모처럼 효도 한번 해보려고 했더니 그도 쉽지가 않다.

차에 올라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까 어머니만 남겨놓고

우리끼리 얼른 폭포를 보고 오겠다는 것부터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 막대기 버리세요!“

서울로 돌아오는 차 뒷좌석에는 그 주렁 막대기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내와 제수의 말에 못들은 척 하시는 어머니는 어떤 생각일까?


”어머니! 그 할아버지 애인허면 좋을틴디 헤필이먼 그때 전화가 와서 산통을 다 깨놓구마 잉!“

커다란 웃음소리가 차창 밖 봄바람 속으로 냅다 내달린다.

어머니도 그 할아버지에게 맘을 둔 것은 아니었을까?


1) 주렁 : 지팡이의 전라도 방언

2) 해찰 :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함


[04.5.7 설악산을 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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