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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2. 보리밥속의 우정

 

“워따~ 뛰지 마라! 배  꺼질라~”

할머니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허벌나게 따뜻한 봄날 춘식이와 나는 낫을 감추고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춘식이가 능숙한 솜씨로 소나무 가지를 잘라낸 후

닭살 돋은 껍질을 벗겨내니 하얀 속살이 나옵니다.


우리는 마치 백구(1)가 뼈다귀 갉아먹듯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떨떠름하지만 단 맛이 나긴 납니다.

트림을 하니 송진 냄새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와 코끝으로 번집니다.


우리는 솔가지를 팽개치고 쏜살같이 달려 내려갔습니다.

마을 맨 뒷집의 생 울타리에 하얀 찔레꽃이 눈꽃처럼 폈기 때문입니다.

새순 돋은 찔레를 꺾어 껍질을 벗기니 비릿한 냄새가 납니다.

하지만 소나무 껍질에 비하면 찰밥입니다.


허기진 우리는 생 울타리 개구멍을 끼어 정지(2)로 갔습니다.

대롱대롱 매달린 밥 바구리(3)를 까치발로 간신히 내려놓고 뚜껑을 여니

시커먼 보리밥이 아무렇게나 누워서 우리를 바라봅니다.

근데 이상하게 보리는 가운데 줄이 있고 몇 알 섞인 쌀은 줄이 없이 뾰족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살강위에서 묵은 지를 꺼내와  시커먼 보리밥에 처억 걸쳐 먹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볼테기(4)가 터지도록 퍼먹는 춘식이를 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청 맛있었던 그 보리밥이 어쩌다 관악산에서 먹어보면

입안에서 뱅뱅 돌며 약 올리더군요.

매일 먹으라 하면 뿔따구 나서 마누라와 부부싸움 할 것입니다.

그래도 옛날 생각하며 가끔 먹으면 별미이더군요.



1) 백구 : 집에서 키우던 하얀 개 이름

2) 정지 : 부엌의 방언

3) 바구리 : 바구니의 방언

4) 볼테기 : 볼 또는 볼따구니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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