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의 이야기들

속 좁은 지천명

 

 

끈적거리는 토요일 오후 전철에 올랐다.

에어컨이 제 딴에는 열심히 성의를 보이건만 전철 안은 찜질방이나 다름없이 푹푹 찐다.

서로의 팔꿈치가 맞닿을 때마다 끈적이는 땀이 묻어 불쾌하기 짝이 없다.

설령 살이 맞닿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땀에 젖은 팔이 내 옷에 닦이면 어쩌나 싶어

신경이 날카로워져 누구든 건들기만 하면 한판 붙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난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이렇게 더운 날 집에 가만있지 않고 모두 어딜 가는 거야?

집에 틀어박혀 있든지 아니면 가까운 산으로 가서 더위를 식히지 않고......‘

나는 가끔 지나칠 만큼 이기적으로 변해 모든 것을 내 잣대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오늘처럼 덥거나 내 맘에 들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양복을 벗어들고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입구에서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떠밀리기 보다는 아무래도

안쪽이 낫기 때문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혹시 앉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이기도 했다.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자 건장한 청년이 귀찮은 듯 인상을 쓰며 바라본다.

힘줄이 불끈 솟은 갈색 팔뚝에는 땀이 줄줄 흐르고 험악한 얼굴은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기세다.

좀 참으면 될 터인데 완전히 물 개똥 밟은 표정이다.

오늘 같은 날 이런 차안에서 짜증나지 않는다면 아마 그 사람은 보살일 것이다.

‘이렇게 더운 한 여름에 결혼할 게 뭐람’

청첩한 사람에게도 짜증이 난다


가능하면 그와 팔꿈치는 물론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눈을 돌렸다.

선반에 빼곡히 붙은 광고지에는 비치파라솔 옆에서 수영복 차림의 여자가

다이빙을 하고 있다.

‘해수욕장인들 시원할까? 옷만 훌렁훌렁 벗었다 뿐이지 사람 북적대고

덥기는 매한가지이지!’

휴가계획 못 잡은 사람 약 올리나 싶어 고개를 돌리고 옆의 사내를 훔쳐보니

뭐가 그리 불만인지 아직도 이마의 주름살을 펴지 않는다.


이런 재수 없는 녀석과는 멀리 떨어져야 하는데 아무래도 자리를 잘못 잡은 듯싶다.

앞에 앉은 처녀가 언제쯤 자리를 비울까 점쳐보지만 좀처럼 내릴 생각을 않는다.

다음 역이 사당역이므로 4호선으로 갈아타느라 자리가 날 법도 한데 재수 없게도

내 앞에 앉은 사람들은 꿈쩍도 않는다.

내린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더 많아져 완전히 손에 걸친 양복이 축축하게 젖기 시작한다.

이대로 스무 정거장을 버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다음이 교대역이라 자리가 빌지도 모른다.

번번이 빗나갔던 내 예상을 깨고 드디어 처녀가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슬쩍 주위를 돌아보니 다행히 나보다 나이든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마치 호랑이가 소변을 칙 갈겨 영역을 표시하듯 이 자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슬쩍 한 발짝 다가섰다.

그건 내가 앉겠다는 의사표시인 것이다.

처녀가 일어서고 점잔하게 앉으려는 순간 내 옆의 똥 씹은 표정의 청년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갖다 붙인다.

누가 봐도 그 청년보다는 내가 연장자라 내가 앉는 것이 도리에 맞다.


계면쩍어 얼굴이 붉어지니 더욱 더워진다.

혹시 염치없는 아줌마가 옆에 서있었더라면 애시 당초 앉을 생각조차

안했을 텐데 느닷없는 젊은 녀석이 자리 탐을 하는 바람에 체면이 말이 아니다.

녀석은 앉자마자 가랑이를 떠억 벌리고 눈을 감은 채 잔뜩 인상을 긁고 있다.

난 비로소 눈감은 녀석을 얼굴을 쏘아보았다.

지천명 한 내가 젊은 녀석과 자리 탐을 하며 신경전을 벌이다니 내 꼴이 우습다.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은 어느 시궁창에 처박아 버린 것일까?


전철을 타건 버스를 타건 노약자가 차에 오르면 우리 같은 지천명한 세대가 일어서고

3-40대 젊은이들은 아예 눈을 감고 딴청을 부리는 것이 요즘의 풍속이다.

4-50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고 자식들에게 버림받는 최초의

세대가 될 거라는 말이 현실로 다가오는가 싶어 씁쓸하다.

애써 쑥스런 모습을 감추려고 태연한 척 또 수영복 차림의 광고에 눈을 박았다.


교대역에 도착하자 문자메시지 날리기에 열중하던 처녀가 뒤늦게 허겁지겁

자리를 비운다.

이제는 선뜻 나서기가 민망해 딴청을 비우며 뜸을 들였다.

누군가 앉아버릴까 조마조마 했지만 다행히 아무도 앉지 않는다.

어쩌면 인상이 고약한 녀석이 싫어서 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아까의 일도 있고 해서 녀석의 옆에 앉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한 시간을 서서 가야 할 일을 생각하니 체면을 내세울 단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내가 엉덩이를 붙이려고 보니 녀석이 가랑이를 떠억 벌려 거의 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빈자리는 엉덩이 반쪽이 겨우 들어갈 듯 좁아져 있었다.

망설이다가 비좁은 틈에 엉덩이를 비벼 넣어 보지만 녀석은 자리를 좁혀 줄 생각을 않는다.

가랑이를 오므려 주면 될 텐데 도시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제멋대로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며 어깨에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아니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녀석의 인상에 주눅이 들었다고 해야 옳다.

그런데 녀석이 가랑이에 힘을 주며 점점 내 자리를 압박해 오는 것이 아닌가?

더우면 땀을 발산시키고자 팔 다리를 벌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행동거지가 무례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복잡한 차안에서 다리를 오므리라는 둥 입씨름을 하기에는

나 또한 똑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니 대 놓고 한마디 할 입장도 아니다.


나도 녀석을 견제하고자 가만히 무릎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양보할 기색 없이 오히려 다리에 힘을 주며 견제를 하려든다.

도대체 이 녀석은 무슨 심보를 갖고 있는 것일까.

실눈 사이로 살펴보니 녀석의 무릎 위에 놓인 불끈 쥔 주먹의 힘줄이 파랗게

튀어 나와 있다.

나의 위축된 모습이 앞에 서있는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까?

슬그머니 화가 나 다시 다리에 힘을 주고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요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 봤나?’

속으로 되 뇌이며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야겠다 싶어 다리에 힘주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녀석은 그럴 때마다 더 세게 나를 압박해 오는 것이다.

‘그래!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나도 꼬라지가 있는 놈이여!’


하나둘 사람들이 내리고 드디어 듬성듬성 자리가 비기 시작한다.

빈자리로 옮겨 앉을까 싶었지만 그러면 내가 지는 것이다.

녀석의 동정을 살피니 녀석이 꿈틀거리며 일어날 채비를 한다.

‘그러면 그렇지! 어디 어른한테 까불고 있어?’

승리했다는 생각이 들자 그동안 구겨진 체면이 살아난 듯도 싶다.

하지만 나이 값 못하며 젊은이와 실랑이를 벌이다니 헛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개운하지가 못하다.

녀석이 슬그머니 일어나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 한다.

“아저씨도 포경수술 했스요?”

‘05.8 더운 여름날 하오

'일상의 이야기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담배한갑, 바지한벌  (0) 2005.10.17
이렇게 썽썽한 것을 버려야?  (0) 2005.09.30
시창소식  (0) 2005.09.03
104호에서 일어난 일  (0) 2005.08.29
간지밥 나무  (0) 2005.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