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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놀자귀신들

43. 운동회 풍경

  운동회

“나가자 씩씩하게 대한 소년아♪  태극기 높이 들고 앞으로 가자. ♬.”

멀리 학교 스피커에서 행진곡이 바람을 타고 가물거립니다.

정말 재수 없게 작년에도 청군이었는데 올해도 또 청군이 되었습니다.

청군은 꼭 힘없는 바보처럼 느껴지지만 은희가 청군이라 그나마 다행입니다.


학교길 콩밭에 내린 하얀 서리가 아침 햇살에 반짝입니다.

덧버선 발에 하얀 줄이 그어진 검정색 운동빤츠를 입으니 오들오들 떨립니다.

돌멩이를 피해 절뚝거리며 걷는 우리들 앞에 오순이와 춘식이 누나가 걸어갑니다.

요즘 오순이는 나를 보면 못 본척하며 입을 삐죽거립니다.

은희가 서울에서 전학 온 뒤로는 더욱 쌀쌀맞게 굽니다.

흥중이가 은희에게 너무 잘해주어 화가 난 내속은 모르고 오순이마저 화를 돋웁니다.

나도 모른 척하며 오순이를 지나쳐 운동장에 이르자 만국기가 펄럭이는 하늘로

애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퍼져나갑니다.

운동장 구석지에서 그림딱지를 치며 우김질을 하는 녀석들 사이에서

흥중이가 눈깔사탕을 입에 물고 침을 질질 흘리며 놀고 있습니다.

지만이를 바라보았지만 당최 호주머니로 손을 넣을 생각을 않습니다.

틀림없이 유과를 가져왔을 텐데도 딴전을 피우는 게 얄밉습니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애들에게 훼방을 놓고 도망가니

갑자기 사이렌이 고함을 지릅니다.

깜짝 놀라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난 사이렌 소리만 들으면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입학식 날 사이렌 소리를 듣고 무서워 벌벌 떨던 기억 때문입니다.

그때는 벚꽃이 필락 말락 한 쌀쌀한 날이었습니다.

낯선 분위기에 촌닭처럼 겁에 질려 있는 내게 갑자기 사이렌이 아가리를

벌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번 운동회는 이래저래 글렀습니다.

예쁜 우리 선생님은 백군이고 코를 꼬집기로 소문난 고약한 남자선생님이 청군입니다.

덤브링에서도 나는 맨 밑에 무릎 꿇고 앉고 기마전에서도 기수는 꿈도 못 꿉니다.

은희가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합니다.


점심때가 되자 어머니가 도시락에 우린 감을 가져 오셨습니다.

우린 얼른 점심을 먹고 다라이에 물건을 파는 아줌마들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다라이 속에는 삼각형 비닐속의 단물이 내 막내 동생 허벅지처럼

곧 터질 듯한 모습으로 복스런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춘식이가 입맛을 다시며 지만이를 쳐다보자 한 개를 삽니다.

난 분홍색을 사기를 바랐는데 녀석이 연두색을 사고 맙니다.

먹는 순서는 지만이 춘식이 순으로 항상 내가 나중에 먹습니다.

지만이가 절반이상을 먹고 춘식이가 나머지의 절반을 빨아먹고 나니

남는 건 쭈글쭈글한 할머니 뱃살처럼 줄어들었습니다.

화가 납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스피커에서 밤 줍기를 한다며 1학년 동생들을 불러냅니다.

우리는 맨 날 먹는 우린감을 입에 물고 지만이의 주머니를 쳐다봅니다만

결국 지만이 주머니는 입을 닫고 말을 안 합니다.


달리기 시간입니다.

가슴이 통게통게(1) 뛰고 정말 못할 노릇입니다.

독한 선생님이 화약총을 들고 이제나 저제나 쏠 때까지 기다리는 순간이

너무 길게 느껴집니다.


난 다행히 동작이 굼뜨고 별명이 거북이인 형기와 한편이 되어 꼴등은 면했습니다.

은희 앞에서 체면을 세워 참말로 다행입니다.

해가 서산에 걸치니 서늘하게 추위가 다가옵니다.

 

운동회가 끝난 운동장이 텅 비어가기 시작하고 상으로 받은 공책이

내 옆구리에서 떨고 있습니다.


1) 통게통게 : 두근 두근의 전라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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