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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이야기들

도로에 나뒹굴던 슬리퍼

 

송정리는 지하철 공사가 끝나지 않은 탓에 항상 시장처럼 붐비고 어지럽다.

대형 기중기가 목을 쭉 빼고 서서 물건을 들어 올리는가 하면

임시정류장에는 시내버스를 타기 위한 사람들이 개미처럼 몰려 있곤 한다.

차들은 몇 번인가 지우고 만든 희미한 차선을 따라 주춤거린다.


신호를 기다리는 사이 옆 차에서 파란 담배연기가 창문으로 몰려나왔다.

나는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듯 담배 피우는 그들을 경멸하곤 한다.


그 사람의 왼손이 연신 창밖으로 들락날락 거리는 폼이 영 불안하다.

저러다 꽁초를 땅에 버리면 어떡하지?

하지만 조마 조마하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기를 피워 올리는 꽁초가

나를 올려다본다.


‘요눔의 시키를 그냥!’

눈 흘김이라도 해 주려고 차를 앞으로 바짝 붙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태연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우리 직원이었다.

순간 못 볼 걸 본 것처럼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사이 파란불은

우리들을 잡아끈다.

나도 한 때 담배를 피웠고 재를 창 밖에 털은 적은 있지만 적어도

담배꽁초를 길에 버린 적은 없었다.


그 친구에게 따끔한 주의를 주겠다며 벼르다가 초겨울이 오고 말았다.

나는 차에 오를 때마다 그 생각이 떠올라 그를 어떻게 할지 고민을

하곤 했다.

싫은 소리는 자식에게도 하기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직설적이 충고로

그 녀석이 받을 충격을 줄이는 방법을 찾느라 시간만 허비하고 만 것이다.


오늘도 가을이 저만큼 달아나고 있는 출근길을 서둘렀다.

상무지구의 치평 초등학교 앞 도로는 학부모들의 자원봉사로 아침이 열린다.

고사리 손에 신발주머니를 들고 가는 애들은 신발주머니로 장난을 치며

신호가 바뀌자마자 앞뒤 좌우 보지 않고 냅다 달린다.


난 아침마다 그곳 네거리를 지나 송정리를 거쳐 출근을 한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애들의 해맑은 표정을 보노라면 욕심 부리며

살아온 내 자신이 부끄럽고 때로는 그들이 내 스승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온갖 부조리와 잘못된 사회시스템을 새롭게 바꿔나갈 미래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이다.


된서리가 내리던 그날도 출근길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학부모들이 녹색깃발을 들고 교통 안내를 하고 있었다.

중앙선 옆 차선에는 왠 슬리퍼 한 짝이 주인을 잃고 나뒹굴고 있었다.

이곳은 지하철도 멀고 노숙자도 없는데 이상한 일이다.

저걸 치울까 말까 망설이며 노려보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재잘거리던 녀석들이 우르르 길을 건너고 그중 한 녀석이

슬리퍼를 툭 차고 지나간다.

피식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자 내 차 앞으로 밀려온 슬리퍼가 도와달라고

애원하듯 나를 쳐다본다.


뒤를 이어 마스크를 쓴 5.6학년쯤 되 보이는 소녀가 예쁘게 걸어왔다.

그 녀석은 나를 한번 힐끗 바라 보더니 슬리퍼를 집어 들고는 길을

건너 인도에 던지는 것이었다.

슬리퍼는 녹색 앞치마를 두른 학부모 발 앞에 떨어졌다.

넓은 플라스틱 차양으로 얼굴을 가린 학부모가 슬리퍼를 발로 밀어놓고

횡단보도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녹색깃발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출근하면 우리 직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 얘기를 해주리라.

소녀가 슬리퍼를 주어 인도에 버리더라고......

예절 교육은 밥상머리에서 이루어지지만

직장 상사의 몫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061217 은빛세상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