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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은 밤이 길어서 더춥다.

 

동짓달은 밤이 길어서 더 춥다.

광주에서 일을 마치고 어머니를 뵙고자 고향집으로 향했다.

어머니 혼자 시골집에 계시다 보니 추운 겨울은 더 걱정이다.

능주로 향하는 군내버스는 어둑신한 겨울밤 추위에 벌벌 떨며 냅다 달린다.

어머니께 기별을 넣을까 망설이다가 포기하고 시골집으로 들어섰다.

겨울 들어서는 친구 분들과 노인정에서 함께 주무신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넣으면 혹시라도 소꿉장난처럼 옴팡진 재미에 빠진 당신에게 훼방꾼이 될까봐

미안한 것도 이유였다.

기나긴 겨울 밤 따뜻한 방에서 친구 분들과 얘기하는 행복이 또 어디 있겠는가?

 

차디찬 현관문을 따고 어둑한 거실 벽에 붙은 전등 스위치를 찾아 올렸다.

이미 밤 아홉시가 너머 도착한 고향집은 안방도 거실도 냉골이다.

석유보일러는 외출기능으로 맞춰져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안방에 들어와 앉았다.

사람이 없는 휑한 집이 이렇게 적막하고 허전하다니......

 

‘밤 늦게 집에 오면 춥고 허전해야!’

지난 가을까지는 친구 분 댁에서 놀다가 밤늦게 집에 오곤 하셨는데 늘 허전하더란다.

나는 어릴 적 하학 후 집이 비어있으면 화가나 발에 밟히는 대로 툭툭 차고 다녔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부엌이던 뒷 채마밭이던 집에 있어야 했다.

행여 밭이나 논에 가 일을 하고 있으면 괜히 심술이 났던 것이다.

내가 그럴진데 반겨줄 사람이라곤 TV밖에 없는 썰렁한 집이 얼마나 허전하셨을까?

방이라도 훈훈하고 불이라도 켜져 있으면 그나마 덜 외로울 텐데

캄캄한 거실에서 더듬더듬 전등불 스위치를 올리는 그 순간 기분이 어떠했을까?

 

올해 겨울 들어서는 친구분들과 노인정에서 주무신단다.

노인정에서 저녁시간을 함께 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독거노인들이 밤 10시까지 한 곳에 모여 놀다가 잠잘 때만 자기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큼 전기절약 효과가 있기 때문에 정부차원에서 장려를 한단다.

가을까지는 그렇게 10시까지 놀다 각자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이제는 차분히 숙식까지 해결하니 집은 그저 폼으로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머니가 주무시던 방에 전기장판 스위치를 켜고 앉아 휘이 둘러보니

오래된 서랍장 위에 얹힌 축 쳐진 이불 위에서 찬바람이 점령군처럼 내려온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멀뚱하게 TV를 바라보고 있어도 춥기는 매 한가지다.

바람 들어올 곳이 없는데 천정에는 성층권 구름 흘러가듯 우풍이 몰려다닌다.

이렇게 추울 때는 소주가 최고로 좋은데......

 

가로등이 어둠에 떨고 있는 신작로 멀리 희미한 점방에 들어가 소주 한 병에

새우깡을 사들고 종종걸음으로 되돌아왔다.

소주 몇 잔을 확확 털어 넣고 TV를 노려보고 있으니 어릴 적 자취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자취방은 왜 그리 우풍이 세고 추웠던지 방안에서도 입김이 서리고 이튿날은

잉크병에 얼음이 사그락 거렸다.

연탄불 불목인 아랫목은 진한 밤색이건만 방바닥은 미지근하기만 했다.

연탄이 아까워 연탄아궁이 공기구멍을 손가락 하나 들락거릴 만큼만 걸레로 숨통을

틔어 놓은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떤 밤은 결국 연탄불이 죽어버리고 오히려 방이 사람 덕을 보려드는

형국이 되고 말아 아침이면 여지없이 얼음이 사각거리는 찬밥을 먹고 학교에 갈 수밖에

없었다.

 

꼭 그 때처럼 방바닥은 따뜻하지만 여전히 코끝이 시려 잠이 오지 않는다.

누워서 TV를 보니 아나운서도 탤런트들도 옆으로 서있다.

내가 이런데 어머니는 얼마나 집에 오기가 싫으셨을까?

방 공기가 따뜻해지려면 얼마나 있어야 할까?

보일러를 틀까 망설이다가 아까운 생각이 들어 포기했다.

 

‘어머니! 석유 아끼지 말고 따뜻하게 하고 자!’

전화 할 때마다 말은 그러마고 하지만 당신이 석유 아까워 춥게 지내시는 것을

내 어찌 모르랴?

나 하룻밤 따스하자고 보일러를 트는 것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나머지 소주병을 비우고 나서 불콰한 얼굴로

누웠으나 수많은 개꿈만 꾸다가 선잠이 들어있는데 어머니 목소리가 들린다.

 

“오메! 아가! 나는 온지도 모르고...... 안 춥디?”

집을 둘러보러 오신 당신은 눈물을 글썽이며 언짢아하신다.

“아니! 괜찮았어. 내가 노인정으로 갈려고 했는데......”

실은 아침을 라면으로 때우고 노인정에 들러 인사하고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방이 금방 따뜻해지더라고 둘러 붙이고 있자 주책없이 기침이 나온다.

“추와서 감기 왔는갑구만.”

“아녀 진즉 감기가 왔는데 지금 나가는 감기여!”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오자 벌써 김치찌개가 보글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날 당신이 노인정에서 친구분들과 함께 10원짜리 화투놀이를 하시다가

잠이 들 수 있으니 이런 복이 또 어디 있는가?

아침밥은 서로 돌아가며 해 드신다니 멀리 있는 자식들은 서로들 마음이 놓인다.

당신들은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서로 의지하는 친 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텅빈 들판을 바라보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던 게 후회가 된다.

어젯밤 그렇게 추웠는데......

그렇다면 어머니도 춥지 않았을 거란 얘기가 아닌가?

20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