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년기의 놀자귀신들

32. 거머리

 

아버지는 우리 손이 닿지 않는 측간 선반에서 농약병을 끄집어 내리십니다.

난 솔직히 농약 하는 날은 싫습니다.

춘식이도 없는 논두렁에 혼자 앉아 물통에 농약을 타놓고 따분하게 앉아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농약은 이슬이 갠 오후에 칩니다.

아버지 뒤를 따라 들판으로 나서니 오후의 햇살이 하품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농약을 빨리 할 수 있도록 바께쓰에 물을 퍼놓고 해골이 그려져 있는 농약을

병뚜껑에 따라 부으니 신기하게도 물이 하얗게 변합니다.

하지만 농약 냄새가 향긋하게 느껴집니다.


덜컥거리는 작두질소리가 논 가운데로 멀어져갑니다.

바늘구멍처럼 작은 2개의 노즐에서 안개처럼 하얗게 농약이 퍼져 나오자 나방들이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메뚜기들은 튀어 도망갑니다.

어느새 수많은 제비들이 우리 논으로 몰려와 마치 잔치를 벌이듯 떼 지어 날아다닙니다.

그들은 튀어 오르는 곤충을 낚아채기 위해 잽싸게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거의 벼에 닿을 듯 비행하기도 합니다. 


대패 밥을 꼬아 만든 밀짚모자를 쓰고 농수로에 앉아 있으니 조용한 늦여름이

멈춘 듯합니다.

5밀리 흑백필름으로 띠를 둘러 모양을 낸 밀짚모자는 햇빛 가리개로는 안성맞춤입니다.


아버님의 농약 통 압축 소리가 아득히 들려옵니다.

개미들이 가랑이 사이를 기어 다니는지 근질근질합니다.

하지만 눈꺼풀이 내려앉는 데 장사 없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기우뚱 합니다.


“철퍼덕!“

논 고랑창으로 처박혀 화들짝 잠이 깨어 눈을 뜨니 아버지가 웃고 계십니다.

온몸이 척척하지만 그래도 시원합니다.


아버지가 삶아온 감자와 옥수수 보자기를 펼치십니다.

옥수수 알갱이를 가로줄을 따라 한 알씩 뽑아 먹으며 아버지 다리를 바라보니

흙이 범벅 되어 있고 정강이에 거머리가 붙어 있습니다.


“아부지! 거마리!”

아버지가 손으로 스윽 문지르자 거머리가 힘없이 떨어집니다.

마치럭비공처럼 퉁퉁 부은 거머리가 저절로 떨어질 참이었나 봅니다.


화가 난 나는 돌 위에 올려놓고 거머리를 짓이기기 시작 했습니다.

바~알간 피가 돌에 그득 합니다.

‘네가 울 아부지 피를 빨아 묵어? 죽어! 죽어! 죽어!’

난 어느새 복수심이 이글거려 조약돌로 내리찧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를 쳐다보니 아무렇지도 않으신 듯 농약 통을 짊어지고 또 논으로 들어가십니다.

아직도 논이 절반이나 남았습니다.


게으른 놈 밭이랑 세고 공부하기 싫은 놈 책장 센다더니 천천히 농약을 치시는

아버지가 밉습니다.

아버지는 벼 포기 하나 하나까지 농약을 치시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요.

식어가는 태양이 서산마루에 걸릴 때쯤

성큼 성큼 걷는 아버지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니 엄청 배가 고픕니다.


** 퇴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때는 별로 농약을 치지 않았지만 비료를 사용하면서부터는 차츰 압축식 분무기로 농약을 하곤 했다. 농약 통은 신쭈(황동)로 제작되었고 빌려주기를

꺼릴 만큼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 후 동력 분무기와 경운기를 이용한 농약치기로 발전하였다 **

'유년기의 놀자귀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34. 철로에 놓은 못!  (0) 2004.09.23
33. 짓이기고 앉아있는 동생  (0) 2004.09.20
31. 송사리 잡던날!  (0) 2004.09.14
30. 홍시감 따던날  (0) 2004.09.07
29. 방학이 끝나던날!  (0) 2004.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