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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석을 세운 미국인들의 따뜻한 가슴을 한순간 사랑했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상대를 뒷전에서 험담을 하는 죄 말고도 미워하는 정도가

지나쳐 증오하기도 한다.

술좌석에서는 특정인의 약점을 들춰내야 술맛이 난다고 할 만큼 마녀사냥을

하기도 하고 결국 동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왕따가 되고 만다.


사회적동물인 사람은 어울려 살 때만 존재의미가 있다.

늑대나 사자와 같은 육식동물뿐만 아니라 초식동물인 코끼리가 무리지어

살며 서로 협업을 통해서 먹이를 찾고 동족을 보호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의미다.

만약 무리에서 낙오되거나 버려지면 곧 그것은 죽음을 뜻한다.


직장은 하나의 무리를 이루는 집단이다.

따라서 집단의 시너지를 높이기 위해 구성원의 인성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신규채용 시 평가척도로 삼기도 한다.

며칠 전 마치 람보가 총질하듯 조승희라는 젊은이가 무고한 학생들의

목숨을 앗아간데 대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를 두고 여러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난 사회학자가 아니지만 그의 행동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한다.

그는 살아오는 동안 누구와도 가슴을 열고 대화할 수 없었다니

가슴이 터져 미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부모는 항상 바빴고 영어에 서툰 부모와 한국어를 잃어버린 자식간에

언어소통이 안되어 속내를 털어놓고 얘기할 수없었고 더구나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다니 그는 항상 외톨이일 수밖에

없었단다.

그 부모가 일벌레였던 아니면 자식 교육을 잘 못시켰던 근본적인 원인은

다민족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1.5세대들의 언어소통 컴플랙스가

아닌가 싶다.


냉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당장 굶어 죽는 시스템은

자녀와의 대화를 후 순위로 밀쳐둘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건 살아남기 위한 생존게임에서 최소한 비겨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

비기거나  이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을 이해한다.


나이 스무 살만  되면 독립된 객체로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야하는

미국식 문화가 정말 합당한 문화인지 또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30이 넘어도 장가들지 않으면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고

캉가루 족이 되는 것을 크게 나무라지 않는다.

너무 지나친 자식사랑일까 아니면 가슴 따뜻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일까?


버지니아 공대 중앙 잔디밭에 살인자 조승희의 추모석이 33인 희생자의

추모석과 함께 세워졌다는 것 또한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문화 충격이다.
더구나 ‘바바라’라는 여학생의 편지 한 장은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필사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우리의 정서와 문화라면 살인자인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우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애도를 표하려 한 것을 정중히 거절한

미국인들의 냉철한 가슴을 믿고 살인자에게도 용서할 줄 아는

미국인들의 따뜻한 가슴을 사랑한다.

그런데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33인의 숫자와는 어떤 관계일까?


==바바라의 편지==

I feel bad in knowing that you did not get help that you so desperately needed. I hope in time that your family will find comfort and healing. God bless. Barvara

(네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걸 알고 가슴이 아팠단다. 머지않아 너의 가족이 평온을 찾아 치유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느님의 축복을!)


그런데 하룻밤이 지나고 나니 그 추모석은 간곳이 없었다.

그래 그들도 인간인데 비명에 목숨을 앗아간 승희를 그리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한순간 행복했었다.

그리고 미국인의 성숙한 문화를 사랑했다.

07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