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여름방학 하던 날!
백엽상!
검 갈색 맥주병을 거꾸로 뒤집어 촘촘히 박아 놓은 화단!
학교 뒤편의 작은 화단에는 키 작은 채송화가 꼬마숙녀처럼 꽃을 피우고
그 옆에는 자주색 꽃을 피운 난초가 아침 이슬을 머금고 반짝거립니다.
나와 춘식이는 교실로 들어가지 않고 해찰(1)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방학 하는 날이라 대청소만 하고 방학 책만 받으면 끝입니다.
백엽상 속은 텅 비어있습니다.
백엽상 속에 온도계를 넣어 두든지 해야 할 텐데 이상합니다.
화단에 일렬로 박혀있는 맥주병들이 엿장수 손에 넘어가지 않은 것도 이상합니다.
“몽근 가리 나와라! 몽근 가리 나와라!”
흙을 긁어모아 흙방아를 찧자 먼지처럼 부드러운 흙이 뾰족하게 쌓입니다.
운동장에서는 애들의 시끄러운 재잘거림이 들려옵니다만 우리가 있는 곳은 조용합니다.
“땡! 땡! 땡!!”
시작종이 울리자 우루루 교실로 몰려가는 애들의 모습이 한바탕 북새통을 이룹니다.
선생님은 보건체조 출석확인표와 함께 방학 책을 나누어 주십니다.
‘여름방학’이라는 글씨가 박힌 방학 책을 받아드니 아직 덜 마른 향긋한 잉크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표지에는 우리또래의 애들이 매미채를 들고 매미를 잡고 있습니다.
한 장을 넘기니 해수욕장에 오색무늬 우산이 세워져 있고 하늘을 날고 있는 갈매기 옆으로
수영복을 입은 예쁜 소녀가 손을 쭉 뻗어 뛰어내리는 모습이 날렵해 보입니다.
왜 오색 무늬의 우산이 필요한지 그리고 왜 애들이 공중에서 뛰어 내리는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아직 바다가 어느 쪽에 있는지 아니 바다가 어떻게 생긴지를 본적이 없으니까요.
물론 ‘사회생활’ 시간에 한강 낙동강 섬진강 금강하고 달달 외웠지만 강이란 곳도
아직 본적이 없는 터라 바다는 더더욱 상상이 안갑니다.
기껏 보아 온 곳이 동네 앞 시냇가이니까요.
우리는 그 시내에서 멱 감으며 모래톱을 파내어 웅덩이를 만든 후
송사리를 잡아넣고 노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매미 소리가 시원하게 들립니다.
한 장을 더 넘기니 초가지붕 원두막과 녹색 얼룩무늬 수박이 갈증 나게 만듭니다.
이솝 우화가 있고 번호가 매겨진 점을 따라 연필로 선을 그으면 캥거루나 사자가
되는 번호 따라 긋기가 있습니다.
국어, 산수, 자연, 도덕 등 쉬운 문제풀이가 있습니다.
문제가 쉬운 건 방학 때 리듬을 잃지 않도록 배려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수수께끼가 있고 종이접기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잘 안 가르쳐 주시는 그런 신비한 내용들로 꽉 차있습니다.
선생님은 방학 동안에 조심해야할 얘기들을 잔소리처럼 하십니다.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학교를 파해 주시자 환호성을 지르며 밀치고 터지는 애들 틈새로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신발장으로 나오니 또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언젠가도 신발이 없어져 엉엉 울며 맨발로 집에 온 적이 있었거든요.
또 엉엉 울며 선생님께 말씀 드렸으나
애들이 전부 집에 돌아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맨 나중에 다 떨어진 고무신이 한 켤레가 남아있었습니다.
집에 가면 아버지께 혼날게 뻔하지만 그래도 엿을 먹을 수 있으니 좋습니다.
그해 여름!
방학책과 잃어버린 고무신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1) 해찰 : 일에는 맘을 두지 않고 이것저것 다른 일에만 신경을 씀
*** 방학이 되면 방학책을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 밭두렁을 지나 집으로 달려오곤 했다. 방학책에는 그림자놀이가 있는가 하면 원두막에 우리 또래 애들이 앉아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보건체조를 하고 빨간 도장을 받는 출석표를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곤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