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여자로 태어 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병원 대기실에서 번호표를 만지작거리는 순간만큼은 누구나
나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간호사의 에스라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만큼 절박해진다.
파출소에 가면 순경 아들이 있었으면 좋겠고 면사무소에 가면
면서기 딸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의사 아들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럴 때 내가 만약 대통령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저것 검사를 다 해 보았으나 원인을 모른다니 더 불안하다.
언제부턴가 소변에 섞인 적혈구 개수가 정상수치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요로결석이나 신장결석이기를 바랐는데 아무이상 없단다.
마지막으로 오줌보를 내시경으로 들여다본단다.
이름하여 방광내시경이라는데 그것이 사람 잡게 아프다는 것이다.
“허벌나게 아프요. 그것이”
검사를 받아 본 적이 있었다는 직원이 내게 남긴 말이다.
평소 엄살이 좀 심하다는 얘기를 듣는 편이지만 여간 두렵지가 않다.
몇 번을 망설이며 결심을 굳혔다가도 하루에도 열 두 번씩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면 지금하고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하는 것이 낫다‘ 라는 얘기를 떠올리며 전대병원으로 향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고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믿는 편이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닥치고 나면 어떤 형태로든 간에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아내가 내려오고 시골에서 어머니가 올라 오셨다.
“검사하다가 병원에서 죽는 사람 봤어? 나 혼자 갈라니까 따라 오지 마”
말은 그렇게 하지만 따라오는 게 그리 싫지 않다.
이 나이에도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니 나는 어머니 앞에서
영원한 어린애다.
검사실 안으로 들어서니 녹색 가운을 걸친 의사가 눈짓으로
옷을 갈아입으란다.
어머니와 아내 앞에서 홀라당 바지를 벗고 차례를 기다리는 나는
이미 남자가 아니었다.
하얀 벽을 초점 없이 바라보다 말고 눈을 감았다.
‘까짓 거 설마 죽이기야 할라구?’
마취주사를 맞은 탓인지 어지럼증이 일어난다.
심란한 가운데 방정맞은 생각들이 스쳐간다.
과연 내가 선고를 받으면 인정하고 감당할 수 있을까?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착실하게 살았는데 만약 잘 못되면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별일 없을 거라며 마음을 다잡고 있으니 50중반의 여인이
녹색치마를 갈아입는다.
금방 온 아줌마가 불려 들어가더니 이내 검사를 마치고 나온다.
여자는 요로가 짧아 마취 없이도 손쉽게 검사를 받는단다.
“아픕디여?”
“아니요. 둘째 애 낳는 것 같애요”
어머니가 묻자 별반 아픈 내색 없이 옷을 갈아입는다.
나야 아기를 낳아보지 않아 모르지만 하여튼 여자들이 너무나 부럽다.
마치 통닭 잡아 놓은 듯 양다리를 걸치고 누우니 커튼이 하반신을
가린다.
차디찬 소독약이 사타구니로 흘러내리고 의사가 아랫도리를
주물럭거린다.
“많이 어지럽습니까?”
“네. 아니요”
많이 어지러워야 덜 아플 텐데 어지러움의 기준을 몰라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렇다고 마취 주사를 더 놓아 줄 리도 없지만 불안하여 말을
바꾸어 본 것이다.
아랫도리를 잡는가 싶더니 날카로운 칼날이 아랫도리를 도려내는
것만 같다.
내 그곳을 헤집고 들어오는 그 놈은 어떻게 생겼을까?
커튼 사이로 화면을 훔쳐보며 의사라도 된 듯 종양을 찾으려 애썼다.
그나저나 암이라 해도 좋으니 어서 내 몸속에서 거추장스런 녀석이
빠져나갔으면 좋겠다.
아랫배는 물론 성기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예리한 통증이
기분 나쁘다
녀석과의 실랑이가 끝나고 내시경이 빠져나가자마자 대번에
소변이 마렵다.
“오줌 싸도 돼요?”
붉은 피와 함께 몇 방울 나오지 않는 소변이 마치 아랫도리를
찢어 내는 것만 같다.
틀림없이 요도 어딘가 찢어져 어긋나고 말았나 보다.
어머니는 오만 인상을 쓰고 있는 나를 안쓰러운 듯 바라보며 묻는다.
“아가 많이 아프냐?”
“아아니. 허벌나게 안 아퍼”
장난기어린 내 말을 듣고 그제야 어머니의 얼굴에 안도감이 감돈다.
이제는 진인사대천명했으니 결과를 들어야할 차례다.
의사의 호출을 받고 세 사람이 들어서자 뜨악한 얼굴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본다.
숨죽이는 우리에게 이상이 없다며 주기적으로 소변검사를 해보란다.
코피를 잘 흘리는 사람이 원인이 없듯이 똑같은 현상이라나?
“근디 담배허고도 관계가 있소?”
어머니가 느닷없이 묻지도 않는 질문을 한다.
“네. 신장은 담배와 관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폐하고 관계가 있는 건 그렇다 치지만
신장과 뭔 관계?~’
“디키냐(들리냐)? 담배가 해롭다고 안 허냐”
애써 의사 말을 무시하려 들자 의사에게 동조라도 구하듯
오금을 박는다.
어쩌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닐까?
병원 문을 나서니 목백일홍 가지사이로 찬란한 햇빛이 눈부시게
쏟아진다.
“어머니가 잠자리 같이 하지 말래. 훗훗”
“어엉? 언제 그래? 그래서 뭐랬어?”
당신은 지천명한 우리들이 아직도 철없는 어린애로 보이는 모양이다.
06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