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심통부리다 손해본 날
연필 장수가 나누어준 연필 한 다스를 받아들고 쏜살같이 달려왔습니다.
두꺼운 곽 종이에 쌓인 연필 중에는 파란 볼펜이 한 자루 있었습니다.
“어무니! 어무니!”
곧 숨이 넘어가듯 어머니를 불러 놓고 신이 나서 연필을 끄집어냈습니다.
어머니는 연필을 받아 들더니 절반씩 나누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 말은 아랫집 춘식이와 나누어 사라는 뜻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껏 어른들끼리 의례 해오던 무언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난 이걸로 할래!”
난 얼른 볼펜을 끼워 넣은 여섯 자루를 챙겨들고 어머니에게 내비췄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볼펜은 아랫집 춘식이네 주라고 말씀하시며
더 이상 눈길도 안주고 태연히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계십니다.
춘식이네는 누나가 있으니 볼펜을 써도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렇잖아도 누나가 없어 부러운 참이었는데 심통이 납니다.
난 앞이 깜깜해져 발을 동동 굴리며 책보를 방안에 던져 놓고 심통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단식투쟁(?)에 들어간 것입니다.
보리밥을 푸는 냄새가 나고 몽당 숟가락으로 가마솥의 누룽지를 긁는 소리가 귀를 후비고 지나갑니다.
“나 밥 안 묵어!”
밥 먹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더더욱 심통이 납니다.
열무김치가 놓이고 감자조림이 날 유혹합니다..
하지만 난 내가 갖고 싶은 그 볼펜이 내 손에 들어올 때까지 버티기로 했습니다.
밥그릇에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가 더욱 배속을 요동치게 만듭니다.
뱃속에서는 마치 시냇물 흘러가듯 꼬르륵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지면 안 됩니다.
힐끔 힐끔 내 눈치를 보며 밥을 먹는 동생들이 얄밉기까지 합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밥 먹으라는 한마디 권유도 없이 묵묵히 저녁을 드십니다.
그럴수록 더욱 화가 나 오기로 버텼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그래 알았다’라고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밥상을 치우고 나자 난 울고 싶어졌습니다.
난 부엌으로 나와 물을 한바가지 마시다 말고 마당에 획 뿌렸습니다.
마당에 서있던 백구가 깜짝 놀라 내 눈치를 보며 허청으로 들어간다.
호롱불을 밑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국어책을 내 놓았습니다.
뱃속에서는 계속해서 꼬르륵거리고 눈이 어찔해 옵니다.
얼마 후 사립문에 매달아둔 깡통속의 돌멩이가 목쉰 듯 달랑거립니다.
마지막 기대를 걸 아버지께서 돌아오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늦은 저녁상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부지! 연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연필을 내놓으니 곽 종이에서 연필을 꺼내보십니다.
아버님께 볼펜 사달라고 조르자 어머니 보다 더 단호하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늦은 저녁상위에 아버지 밥과 내 밥이 마주보고 들어왔습니다.
“왜? 삼식이도 안 먹었어?”
난 토라져 밥맛이 없다며 국어책에 눈을 돌렸습니다.
아버지께는 잘못하면 매타작이 될게 뻔합니다.
난 숨도 못 쉬고 들락거리며 물만 마셔댔습니다.
내 맘을 이렇게도 몰라주는 어머니 아버지가 너무나 야속합니다.
**** 1795년 프랑스의 몽테가 흑연과 진흙을 혼합해서 고온으로 구워낸 심이 현대 연필의 시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946년 대전에서 동아연필이 생산되기 시작했고 이어 49년에 문화연필이 생산되었다. 학용품을 검사하던 60년대에는 만약 필통에 지우개가 없으면 혼나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 후 지우개가 달린 연필이 나오기 시작하여 한동안 인기가 대단했지만 볼펜과 샤프펜슬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