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이야기들

어머니의 팬티

창강_스테파노 2004. 5. 11. 16:11
 

어버이날을 맞아 나들이에 나섰다.

시골에 혼자계신 어머니를 올라오시게 한 후 설악산으로 떠난 것이다.

내가 편하자고 구경 핑계대고 어머니를 올라오시게 한 것이 사실은 속이 들여다보인다.


역마살이 낄 만큼 여행을 좋아하신다는 명분을 들어 핑계 좋아 닭 잡아먹는 꼴이다.

차창밖에 스치는 신록이 생명의 약동을 느끼게 하지만 내년에도 어머니와 같이

이 길을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을 하니 금새 우울해졌다.


아내와 제수도 연중행사를 여행으로 때우니 무거운 짐 던 것처럼 좋아한다.

솔직히 나는 간이 벌렁거릴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다.


속초 대포항에서 저녁을 마치고 콘도로 들었다.

16평형 원룸밖에 없고 그것도 바다가 보이는 방이라 웃돈 5000원을 더 내야 한다는 말에

아무소리 못하고 키를 받아 들었다.


옷걸이도 없고 덩그마니 TV와 탁자 그리고 2인용 소파가 방안 살림의 전부다.

더구나 온돌이 아닌 더블 침대가 신경이 쓰인다.


아내와 어머니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아내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것은 내가 워낙 코를 골아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짐을 풀고 소주를 한잔 마시고 있자니 어머님이 목욕탕에서 씻고 나오신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어지간히 술이 올라 반쯤 감긴 눈으로 TV에 눈을 대고 있으려니

TV받침대 모서리에 걸린 손수건(?) 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틈에 아내가 손수건을 빨아 널어 뒀지?‘

자세히 보니 그건 아내 몸통 둘은 들어갈 만큼 고무줄이 늘어진 팬티였다.


제수가 얼굴이 빨개져서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며 얼른 팬티를 들고 나간다.

시아주버님 앞이라 브라도 타올로 덮어 눈에 안 띄게 말리는데

팬티를 터억하니 널어 놨으니 부끄러운 건 당연할 것이다.


어머니! 

갈아입을 팬티 없으면 아내 것이라도 달라고 하시지!


문득 어릴 적 풀 먹인 당목 팬티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손수 미싱으로 만들어준 팬티는 똥꼬를 씹는 그런 팬티였던 것이다.

난 아무렇지 않다가도 체육복 갈아입을 때만 되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근데 오늘 그 팬티를 보니 왜 갑자기 눈물이 고이는 걸까?

그 어렵던 시절 멋있는 팬티 한번 못 입어 보시고

이제 당신에게는 과분한 그 팬티가 왜 이리 눈시울을 적시는 걸까?

[04. 5.8 어버이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