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라는 숫자와 꽃잎!
여느 때와 같이 행장을 차리고 계곡으로 들어섰다.
계곡 초입에는 작년에 일궜던 텃밭 대신 호박 구덩이가 있고
한 가운데에는 솜털을 뒤집어쓴 호박 떡잎이 힘차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합수(1) 냄새가 진하게 코끝을 스치고 있는 들판으로 달리고 있었다.
항상 요맘때면 보리밭은 물론 호박 구덩이에 가득 부어둔 합수가
쫀득쫀득 굳어 그 냄새가 더욱 짙어지곤 했다.
그 지독한 농촌의 향기(?)를 떠올리며 픽 웃음을 지었다.
내 웃음을 알리 없는 아내는 묵묵히 묵주를 들고 뒤따른다.
새싹이 돋기 시작한 산자락에는 하얀 포장을 두른 듯 산 벚꽃이 터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바람의 유혹에 꽃비가 되어 순종한다.
산 벚꽃이 필 때면 항상 순정을 지키는 처녀를 떠올리곤 한다.
그것은 도심에 핀 왕 벚과는 달리 요염하지 않고 요란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화장할 줄도 모른 채 외로운 산속에서 홀로 자신을 가꾸어 나간다.
미워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려 눈을 감았다.
하지만 범생이인 내게는 배낭속의 막걸리 생각만 어른거린다.
눈을 뜨니 발아래 떨어진 수많은 꽃잎들은 순백이 아니었다.
내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시하듯 살짝 연분홍색을 띄고 있었다.
예비숙녀가 로션 바르듯 티 안나 게 화장을 한건가?
고개 들어 확인하려들자 또다시 우수수 꽃비가 내린다.
두 서너 잎 남은 꽃잎이 이 빠진 할머니처럼 쓸쓸해 보인다.
산 벚꽃을 뒤로하고 걷자니 종소리처럼 맑은 새소리가 또르르 굴러간다.
길섶에 핀 노란 풀꽃들이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모습이 애절해 보인다.
’그래 알았어! 한번 봐 줄께!‘
난 꽃을 보다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벚꽃도 다섯 개의 꽃잎이었는데 이 녀석도 다섯 개였다.
난 만나는 꽃들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조팝나무 꽃도 복숭아꽃도 그리고 비록 통꽃이지만 진달래도 다섯 잎으로 갈라져 있었다.
아니 내가 만난 대부분의 꽃들은 다섯 잎이었다.
그렇다면 5라는 숫자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이상적인 인원은 5명이 적당하다.
성과를 최대한 올릴 수 있고 설령 한사람이 요령을 피워도 목표달성은 무난하다.
아울러 파벌이 조성되지 않고 팀웍에 문제가 발생하면 조정자가 생겨나는
최적의 숫자이기도 하다.
혹시 자연의 이치도 5라는 숫자가 가장 잘 어울리는 생존의 어떤 법칙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왜 라일락은 4장일까?
어쩌면 진한 향기가 나머지 한 장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억지로 꿰어 맞춰보며 산길을 돌아 내려오니 노부부가 정겹게 앉아 점심을 들고 있었다.
산 벚꽃만큼이나 하얀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손에 들린 상추쌈을 받아먹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린다.
마치 갓 부화한 어린 새가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을 떠올리며 빙긋이 웃고 말았다.
1) 합수 : 재래식 변소에 묵혀둔 똥.오줌 의 전라도 방언
[04.4.18 관악산을 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