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이야기들

가을이 오는소리

창강_스테파노 2005. 10. 24. 16:11
 

이름 없는 풀처럼 숨어 살다가

갈바람 스치는 날 청초하게 꽃 피우니

네 이름은 교만하지 않은 구절초.

온갖 초목이 자태를 뽐내던 날에도

있는 듯 없는 듯 꿈을 키우던 꽃

사그라지는 별을 모아 하얀 볼로 반겨주는

서럽도록 가슴시린 꽃.


가을은 어디서 어떻게 다가올까?

가을은 높은 하늘을 달고 오고 갈길 바삐 나는 철새들의 날갯짓 소리를 몰고 온다.

가을은 고즈넉한 산길에서 뒤따라올 삭막한 겨울에 쫒기 듯 맨발 벗고

뒤를 훔쳐보며 뒤엇뒤엇 다가온다.

또한 가을은 산길에 지는 낙엽소리와 들판에 피어오르는 안개를 머금고 온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들릴 듯한 낙엽 지는 소리는 가슴에 서러움을 켜켜이

채워 넣는 묘한 심술을 갖고 있다.

핑그르르 돌며 떨어지는 낙엽이 가슴을 허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을 산은 억새와 벗하며 이름 없는 들꽃과도 친구한다.

연분홍 억새가 힘을 빼고 하얗게 백발을 드러내면 가을은 깊어간다.

가을 산이 매력적인 것은 산자락 한 귀퉁이에서 잡초처럼 숨어살던 구절초를

청초한 여인으로 분장시키는 마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구절초는 새벽녘 사그라지는 별 떨기를 따 모아 꽃잎을 만들고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하지 못한 속내를 들킬까봐 수줍은 모습으로 피어난다.

그는 속세를 뒤로하고 낙엽 한 잎 떨어지면 서럽게 몸을 떤다.


추수 끝난 가을 들판에 나서면 해거름 녘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자욱하다.

텅 빈 들판에 농부들이 피워 올린 연기도 안개와 어우러져 함께 한다.

나직이 깔려있는 안개는 마치 날개 옷 잃은 선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이따금 맘을 스산하게도 허전하게도 만들지만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스승이기하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교만하고 이웃을 업신여기지는 않았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아귀다툼하며 살아가는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봄이 소년이라면 여름은 청년이고 가을은 장년이다.

다가올 노년을 준비하는 그런 계절이 가을이 아닌가 싶다.

무덥던 여름날 바다로 산으로 삼월이 널뛰듯 싸다니던 교만도

아지랑이 가물거리던 봄날 가슴 터질 듯한 희망도 차분히 가라앉히고

스스로 미래를 준비하도록 명상의 시간을 갖게 한다.

가을은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를 속삭이며 다가온다.


05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