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몽(동인지 게제글)
학교가 파하자 애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운동장을 넘어가고 있었다. 이따금 철봉 밑에서 우김질 하는 개구쟁이들을 보며 피식 웃자 아카시아 나무위로 개고마리(1) 한 쌍이 꾸르륵대며 날아간다. 이른 봄 눈보라처럼 하얀 꽃을 흩날리던 벚꽃나무 아래에는 여자 애들이 팔짝팔짝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다. 계단에 앉아 물끄러미 먼 산을 바라보니 한줄기 바람이 향긋한 아카시아 냄새를 싣고 여린 잎들 사이로 지나간다. 이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 걸까? 바람을 찾아 고개를 돌리니 연초록 나염(2) 무늬 스커트를 입은 처녀가 운동장을 가로질러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다. 나풀거리는 스커트 밑으로 보일 듯 말 듯 하얀 무릎이 눈부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어디서 보았을까? 이 학교에 새로 부임한 선생인가?’ 둥그스름한 얼굴에 적당히 살진 그녀의 얼굴이 어디선가 본 듯 낯익다. 곁눈으로 슬쩍 그녀를 훔쳐보며 애써 산등성이의 소나무로 눈길을 돌렸다.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에서 문득 어릴 적 은희가 떠오른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졸업한 후 뒤늦게 그것이 짝사랑임을 알았던 소녀! 그녀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돼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항상 나풀거리는 치마와 하얀 스타킹을 즐겨 신었던 소녀! .난 그때의 기억 끄트머리를 붙잡고 지금도 스커트차림을 좋아한다. 갑자기 숨이 멎을 것만 같아 크게 심호흡을 하고 귀를 기울였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와 처녀의 치마 자락 스치는 소리가 귓전에 스친다.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숙인 채 아카시아 이파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분 냄새가 코끝을 스치니 어지럼증이 날것만 같다. 아니 분 냄새가 아니고 어쩜 아카시아 향일지도 모른다. 아카시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 무게를 못 이기고 제풀에 쳐져 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사라진 걸까? 별안간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그녀는 숙직실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숙직실 뒤에는 아카시아 꽃들이 허벌나게 피어있었고 또 개고마리가 꾸르륵대며 날아가고 있었다. 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뒤쫓으려다말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어릴 적 아끼던 구슬을 잃어버리고 엉엉 울었던 그 때처럼 가슴 한구석이 텅 비고 허전함이 밀려왔다. 한숨을 몰아쉬고 운동장을 보니 멀리 미끄럼틀에서 재잘대던 녀석들이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다. 폴폴 날리는 먼지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뒹굴더니 결국 한 녀석이 으앙 하고 울고 만다. 싸움은 싱겁게 끝났지만 고무줄놀이를 하던 여자애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고무줄을 걷는다. 흰 웃음을 날리며 일어서자 어느새 그녀가 아카시아 이파리를 손에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또다시 숨이 막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아까의 그 향기를 담고 다가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알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보낸다. 나도 따라 같이 웃어 주었다. 그녀가 뭐라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하며 아카시아 잎 파리를 하나씩 뜯어냈다. 물론 이기는 사람이 한 계단씩 올라가는 게임이었다. 그녀는 가위바위보를 참 잘했다. 계단위에 선 그녀가 이겼다며 활짝 웃고는 한 계단씩 멀어져간다. “가위바위보!” 이번에는 반드시 이겨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 가위를 내밀다말고 그녀의 스커트 밑에 드러난 허벅지가 혼란스러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느새 계단 꼭대기에 도달한 그녀가 싱긋 웃더니 또다시 숙직실 뒤편으로 사라진다. 난 허탈감에 몸을 뒤척이다가 낮잠에서 깨었다. 말똥말똥해진 머리 속으로 그녀의 잔영이 흘러가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아카시아 꽃 냄새가 진하게 코끝을 스쳐 지나간다. 오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밀려온다. 요즘 봄 가뭄에 목말라 하고 있는데 정말 비가 올려나? 바람 끝이 물기를 머금은 듯 무겁게 다가오고 있었다. 1) 개고마리 : 때까치, 개가마리라고도 함 2) 나염 : 날염(捺染)'의 사투리로 옷감에 부분적으로 착색하여 무늬를 만드는 염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