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이야기들

어떤인연

창강_스테파노 2005. 4. 7. 10:38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언젠가 지나치는 길에 우연히 만난 그가 들르겠다는 말을 한 적은 있었지만

별로 기억에 두지 않고 있었던 터라 뜨악하며 그를 맞았다.

그는 초년병 기자시절 막내 동생처럼 붙임성 있게 다가왔다.

사실 기자나 정치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던 내게 그는 다소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끊일 듯 하면서도 가느다란 줄을 달고 다녔다.


“어서와! 김기자! 근데 황사장은 왠일이여?”

환하게 웃으며 내 방을 찾은 그가 근 2년이 넘도록 연락이 끊겼던 옛 직장 동료를

달고 나타났다.

마치 그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들처럼 다정하게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옛 동료는 점퍼 어께에 새겨진 문양을 가리키며 악수를 청한다.

내가 그 문양을 알 리가 없건만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을 보니 옛날의 모습 그대로다.


한사람은 기자이고 또 한사람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출신의 CEO!

나이가 근 10여년 이상 차이가 나 아무리 봐도 알고 지내온 사이라고 믿기에는

내 상상력이 뒤따라 주지 않고 동업한다고 믿기에도 너무 그림이 맞지 않는다.


“안거! 차 한 잔 해!”

후배기자 보다는 오랜만에 보는 옛 동료의 근황이 궁금하였다.

“근데 둘이 어떤 사이여?”

“오다 차에서 만났어요!”

궁금증을 못 참고 성질이 급한 내가 차가 나오기도 전에 묻자 후배기자가 대답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이란 말인가?

세상은 한 다리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더니 영락없는 말이다.


원래 황사장은 15-6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회사의 내로라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다.

약간 뻥이 있는 그를 어떤 이는 베짱이 크다고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달변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어쩌다 그가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주정이 심하여 가까이 하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눈인사 정도로만 지내는 어찌 보면 외톨이였다.

그런 그가 벤처의 붐이 일던 90년대 중반 대박의 꿈을 안고 위해 사표를 던졌다.

혹자는 그에게 찬사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 성질에 쪽박 찰 거라며 입을 삐죽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IMF를 맞아 한바탕 재주를 넘은 후 초라해진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내가 보기에도 별 쓸모가 없는 솔루션을 들고 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기도 했다.


그 후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더니 언젠가는 일본 진출을 위해 누구누구랑 동업을 한다며 새로운 명함을 들고 나타났다.

역시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길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또한 영업이랍시고 옛 직장 동료들을 찾아다녀보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사람은 있을 때 잘해야 돼!

그를 돕고 싶었지만 결국 한번도 도와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는 이리저리 되작거리며 사업을 하는지 마는지 소식이 뜸했다.

언제부턴가 소식이 뚝 끊어졌고 나 또한 그를 잊은 지 근 3년이 넘은 듯싶다.

그런 그가 오늘 점퍼 차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 어떤 사이야?”

“형님! 김기자가 내차를 탔어요!”

대단한 인연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게 말을 꺼낸다.

자기택시 손님인 후배기자와 얘기를 하다보니 이런 인연이 되었단다.

그제야 옛 동료의 어깨에 박힌 문양이 눈에 들어오고 자세히 보니 이 지역의

콜택시 회사 마크였다.

“잘 했어! 나도 정년퇴직하면 개인택시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돼?”

당당하게 자신의 직업을 밝히며 자신만만해하는 그를 보니 적이 마음이 놓인다.

거리의 노숙자들의 가장 큰 정신적인 병폐는 패배감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어 결국 멀쩡한 몸으로 일을 피하려 드는 것이다.

그는 정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진정한 프로였다.


“형님! 한바퀴 돌고 올게 점심 같이해요!”

사납금을 아직 못 채웠으니 얼른 채우고 돌아올 테니 점심을 같이 하잔다.

후배의 말이 고맙지만 사실 차 마시는 시간까지 빼앗은 듯싶어 미안하다.

창밖으로 돌아나가는 택시를 바라보며 오늘 손님이 끊이지 않길 빌어본다.

명예와 부는 영원히 몸에 지니고 갈 수 없으니 제발 더 이상 엎지만 말고

정말 한세상 없는 듯이 왔다가는 빈 마음으로 열심히 살게!

항상 즐거운 모습으로 휘파람 불며 안전운전 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