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네.
또다시 가을이 저만치서 온다.
베란다 너무 관악산 이파리들이 숨을 죽인 걸 보면,
그리고 아파트 벚나무 이파리가 물든 것을 보면…
아내는 가을만 되면 내장사 한번 못 가봤다고 녹음기 틀 듯 해마다 잔소리를 한다.
그러다 어디서 전해 받았는지 서울근교 대중교통 가을 여행지를 슬쩍 보여준다.
못 본 척하다가 곁눈으로 들여다봤다.
나는 차 끌고 교외로 떠나는 건 질색이다.
돌아오는 길 차가 막혀 만신창이가 된 경험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가 보여준 제목은 대중교통을 이용한 서울근교 가을 여행이란다.
가을이 오는가 싶은데 단풍은 어느새 지는 줄 모르게 지고 만다.
실은 70년이 되도록 단풍에 꼭 맞춰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
언젠가는 매스컴에서 단풍이 절정이라고 하여 큰 맘먹고 떠났건만 어느새 단풍은 지고 없었다.
이리저리 속아만 산 것 같은 세월이 허망하여 아내에게 큰 인심 한번 쓰듯 길상사로 향했다.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거리이니 거창하게 여행이랄 것도 없다.
아침 겸 점심을 마치고 나니 벌써 10시가 넘었다.
고뿔도 단숨에 빼더라고 떠날 준비하자는 말에 2시 너머 나가자며 늘어진다.
“무슨 여행을 오후에 가?”
“빨래도 하고!”
남들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시간에 해넘이에 여행을 떠나다니……
그러다 보면 집 떠나기 싫어져 계획이 물거품되기 십상이다.
“빨래 꼭 지금 해야 해?”
버럭 소리 지르자 주섬주섬 옷을 입더니 나가잔다.
한성대 입구에 내리자 느닷없는 가을비가 내린다.
“이럴 때 승용차로 와야 하는데!”
아내는 승용차를 안 끌고 온 나를 은근히 탓한다.
“그럴려면 뭐 하러 나와?”
본 데 없는 잔소리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나는 한마디 더 궁시렁댔다.
“잘 나가다가 꼭 속을 뒤집어!
아내가 꾹 참는다.
마을버스는 성북동 골목길로 돌아들었다.
내가 40년 동안 살던 봉천동 그 골목길과 달리 부촌이다.
성북동 성당을 지나 내려보니 일주문이 마치 궁전 같다.
가을비 내리는 길상사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지나간다.
아내는 선머슴 빈 지게 지고 가듯 앞서간다.
비에 젖은 구절초가 처량하다.
이 비가 그치면 길상사의 가을은 더욱 깊어 가리라.
스님들 거처를 지나 진영각 툇마루에 앉았다.
법정스님이 거처한 곳.
그는 이 툇마루에 앉아 우주를 보았을 텐데 나는 세속을 보고 있다.
추녀 양철 물받이에서 빗물이 소리 내어 흘러내린다.
모든 걸 놓고 떠나야 할 인생.
욕심 많은 난 언제나 무소유의 발치에라도 다가갈 수 있을까?
15살 결혼하여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고 열여섯에 기생이 되었다는 김영한 님.
백석(백기행)이 지어준 子夜라는 이름으로 황진이처럼 살다 간 여인
그 재산(대원각)은 백석의 시 한 구절보다 못하다는 절절한 사랑
길상화란 법명을 받고 눈 오는 날 한 줌 가루가 되어 길상헌 뒷산에 뿌려진 소설 같은 생애
가을비 내리는 길상사에서 나를 되돌아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걸.
2021.1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