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추월산에서 길을 잃어버린 젊은날

창강_스테파노 2019. 6. 2. 23:15


사람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어디든 낯선 곳으로 떠나고자 한다.

어느 봄날 탱자나무 과수원 길을 마치 처음 만나는 길처럼 생경한 기분으로 걸어가본 적이 있다.

그 길을 따라 한없이 걸어가면 무릉도원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20여년 전이다.

남쪽지방에서 주말부부로 근무하던 시절이다.

집에 가지 않는 날은 무등산을 오르거나 어머니가 계신 시골집에서 주말을 보냈다.

언젠가 여름이 시작하는 5월에 홀로 담양의 추월산을 찾아 나섰다.

처음 찾는 산은 여행만큼 가슴이 설렌다.

 

군내버스를 타고 용면 쌍태리 추월산 초입에서 내려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분홍빛 병꽃이 수줍은 처녀처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는 5월의 추월산은 온통 초록잔치였다.

등산객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혼자 걷자니 호젓함 뒤에 막연한 두려움이 포개졌다.

지방이라 등산 붐이 없다고는 하지마는 등산객을 한 사람도 만날 수 없다니…..

 

산죽이 우거진 산길을 거쳐 능선에 오르니 깎아지른 절벽 아래 호수가 나타났다.

초록물감을 잔뜩 풀어놓은 것처럼 파란 호수가 있었다니 무슨 호수일까?

바위에 걸터앉아 지도를 보니 담양호란다.

준비성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차라리 가슴 떨리는 여행이라더니……

신록이 잔치를 벌이는 산 그늘에 앉아 주먹밥을 먹으며 지나온 삶을 떠올려 봤다.

 

얼마 있으면 정년인데 은퇴 후 나는 어떤 모습일까?

노후는 어떻게 지내는 것이 좋을까?

돗자리 위에 누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하다 잠이 들었다.

으스스 한기가 들어 눈을 떠보니 어느덧 해가 서산에 걸려있다.

 

막걸리 한 병에 초여름 해도 짧게 기운다.

저 멀리 담양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길을 가늠하여 길을 잡았다.

올라왔던 길보다는 새로운 길이 마음을 빼앗았다.

 

내려가다 보니 길이 어느새 길이 끝나고 습기 머금은 계곡이 이어졌다.

계곡은 일찍 어둠이 찾아온다.

계곡을 내려가면 틀림없이 논 밭이 나타날 터인데 점점 더 어두운 계곡이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정상으로 다시 올라가라.’

하지만 되짚어 산을 오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분명 읍내로 들어서는 신작로가 보일 듯 싶은데 도무지 빠져 나갈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숲 속에는 청미래 덩굴과 찔레가 길을 가로막았다.

허리를 굽혀 간신히 가시덤불을 빠져 나오니 하얀 두개골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혹시 이 근방에 맹수가 나를 노리고 있지 않을까?

호랑이야 6.25 전에 사라졌으니 있을 리 만무하고 

그렇다고 삵이 저렇게 큰 동물을 잡아 먹었을 리 또한 만무하다…. 

 

혹시 동네 청년들이 잡아먹고 버렸을까?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울창한 계곡까지 와서 견공을 잡아 먹었을 리 없다.

차라리 견공이라면 마을이 있을 것이다.

두개골의 크기로 보아 견공이 아님은 분명하다.

 

스틱을 불끈 쥐고 방향을 틀어 옆 산으로 올라갔다.

오르다 보니 절벽 아래로 미등을 켠 자동차가 지나간다.

휴우! 길을 찾았다.’

절벽을 피해 내려가자.

불빛이 주는 안존감!

 

긴장이 풀려 휘청거리며 가시밭을 몇 번 구르고 나서 신작로로 나왔다.

어스름 신작로에 이따금 차들이 지나간다.

손을 들었지만 추레한 등산객에게 선뜻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

잘못하면 담양 읍내까지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터벅터벅 얼마큼 걷다 보니 뒤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차가 오고 있었다.

번쩍 손을 들자 저만치 앞서 용달차가 힘들게 멈춰섰다.

행여 다시 액슬을 밟지 않을까 힘껏 뛰어 달려갔다.

운전사는 내 얼굴을 보더니 사방이 긁혔다며 얼른 연고를 발라야겠단다.

그까짓 얼굴에 상처가 대순가?

금새 읍내 차부에 도착하였다.

주머니를 뒤적여 만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주고 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도움을 받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별에서 여행을 하고 있다.

난 이제 여행이 끝나가는 나이가 되었고 손녀는 이제 갓 여행을 시작한다.

문득 글을 읽다 보니 이 생각이 떠오른다.

 

- 19.5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를 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