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오는 안양천
이른 점심을 먹고 안양천 둑방 길로 올라섰다.
안양천은 구로공단이 디지털단지로 바뀌고 나서 직장인들이 산책을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젊은이들 손에는 유행처럼 테이크아웃 커피가 손에 들려있다.
요즘에는 점심은 굶어도 커피는 마셔야 하는 풍속이 유행이다
김태희커피나 김연아커피를 즐겨 마시는 난 결국 그들에게 이방인이다.
개나리가 한 풀 꺾인 안양천에는 벚꽃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자태를 뽐내고 있다.
둑방 중동에는 젊은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햇볕을 등에 지고 점심을 먹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의 자유분방함은 선뜻 이해할 수도 없고 부럽기도 하다.
하기야 봄소풍이 별것인가?
뚝방길에 올라서면 봄바람과 함께 연가가 들려오기도 하고 유년으로 되돌리기도 한다.
그 봄!
우리는 선생님 뒤를 따라 줄지어 지석천 강변에 있는 영벽정으로 나갔다.
동무들과 빙 둘러 앉아 수건 돌리기가 끝나면 남학생들은 씨름을 했다.
씨름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힘이 세거나 체격이 크면 이기는
속말로 무데뽀(막무가내) 씨름이었는데 어쩌다 덩치가 커도 제풀에 나자빠지기도 했던
개똥 씨름이었다.
난 그날 얼굴이 파리한 현식이와 첫 상대가 되어 간단히 눕혔다.
여자애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자 나는 수줍어 얼른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난생 처음 박수를 받고 보니 머쓱하기도 했지만 꽤나 기분이 좋았다.
두 번째는 이긴 사람끼리 2차 격돌을 붙는 요즘 말하면 토너먼트였다.
기영이는 나보다 힘도 세고 덩치도 컸다.
하필이면 그 녀석과 붙다니 시작도 하기 전에 나는 이미 기가 죽어있었다.
녀석이 오른 손으로는 내 바지 허리춤을 왼 손으로는 호주머니를 힘주어 잡는다.
“이겨라! 이겨라!”
누가 이기라는지 알 수 없지만 여자애들이 손뼉을 치며 응원을 한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자 마자 녀석이 갑자기 힘을 주며 끌어당긴다.
왼쪽 아니면 오른쪽으로 눕혀야 할 텐데 녀석이 엉뚱한 짓을 한 것이다.
반칙은 아니지만 워낙 순식간에 힘을 주며 나를 끌어당기는 바람에 뿌지직 소리와 함께
뒤로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옆으로 넘어지면 우아하기라도 할 텐데 여자애들 앞에서 하늘보고 뒤로 넘어지다니….
소위 말하는 배치기를 당한 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바지가랑이가 찢어져 광목 팬티가 드러나고 말았다.
요즘 같은 기품 있는 팬티도 아니고 광목 천을 끊어다 집에서 재봉틀로 박아 만든
누리끼리한 팬티였다
여학생들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남학생들은 배꼽이 터지라고 웃어댄다.
씨름도 지고 팬티 보이고….
그 봄처럼 안양천에도 봄바람이 불어온다.
징검다리 건너 둑방길은 광명시에 속한다.
징검다리를 보면 비가 와 물이 불어 고무신을 떠 날려버리고 엉엉 울던 기억이
가슴앓이가 되어 추억이라며 기억을 헤집고 나온다
겨우내 숨죽이던 물이 모여 제법 물살을 일으키며 징검다리 사이로 흘러간다.
벌써 산란기인가?
어른 팔뚝보다 굵은 잉어들이 얕은 물을 이리저리 헤집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징검다리 건너 둑방길의 벚꽃은 수령이 꽤 오래되어 고목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몸통 줄기에서도 가냘프게 꽃을 피워내는 생명력은 보는 이의 가슴을 고동치게 만든다.
개나리와 어우러진 둑방길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물론 화개장터 십 리 벚꽃길이나 광양 산수유 꽃 길에 비할 수는 없지만……
개나리는 꽃 말이 희망이란다.
겨우내 회색 빛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노란색으로 분장을 하고 다가와
새로운 꿈을 얘기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개나리 꽃을 자세히 보면 꽃잎이 4개다.
클로버도 네 이파리가 있듯 어쩌면 개나리꽃도 5옆이 있을지도 모른다.
봄의 유혹에 못 이겨 몽환 속으로 빨려 들어가 다섯 잎 꽃잎을 찾아 나섰다.
등허리로 봄 햇살이 늘어지게 하품을 한다.
‘아! 다섯 잎 개나리다!’
오늘 내게 행운이 있지 않을까?
꽃잎을 바라보니 내 마음도 어느새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문득 빈센트 반 고흐가 떠오른다.
유난히도 노란색 물감을 즐겨 사용하던 가난한 화가.
몽환의 술 압셍트에 취해 세상이 노랗게 보인 걸까 아니면 정말 노란색을 좋아한 것일까?
나 또한 개나리에 취해 노란색으로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옛날 가난하던 시절 산토닝이라는 회충약을 먹고 하늘이 노랗게 보였듯이….
이 봄은 또 이렇게 간다.
3013. 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