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끝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드보통’이라는 스위스 젊은 작가의 사랑이야기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젊은이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장년이든 노년이든 사랑이라는 단어는 가슴 뛰게 만든다.
젊은이의 사랑이 활활 타는 불꽃이라면 중.장년의 사랑은 현실적이다.
나쁘게 말하면 계산적이라는 의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가슴 졸이는 즐거움이지만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것은 가슴 터지는 행복이다.
아스라한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첫사랑은 우유 빛 얼굴이었다.
그녀의 집은 신작로와 골목길을 끼고 있었고 난 그 골목을 수없이 서성거렸다.
들창 너머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면 가슴이 뛰어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삐그덕 대문을 밀고 나오면 못 본 척 딴전을 피우며 자리를 피했던 기억.
사랑은 그렇게 애를 태우고 잠 못 이루게 만든다.
인간만이 사랑이라는 선물을 나눠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세월이 흘러 소녀가 아닌 여인을 만나고 풋사랑이 아닌 사랑이 완성되기까지
연인들은 서로 상대를 탐색하기 위해 줄다리기를 계속한다.
수없이 삐치고 토라지기를 반복하다가 사랑이 깨지기도 한다
삐침은 자존심 싸움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양다리 걸치기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
삐침은 자기증식의 경향이 있어 사과를 하더라도 쉬이 풀어지지가 않는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부모가 충족시켜주지 않을 때
밥을 안 먹겠다고 숟가락을 내던지며 시위에 들어가는 것과 동일선상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 목적이 달성 되기 전에 숟가락을 잡으면 그 목표는 포기하는 것이나 같다.
사랑도 배신자인 상대의 진정성이 납득할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삐침은 끝나지 않는다.
삐침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것은 상대에 대한 낭만적 테러리즘이다.
낭만적 테러리즘은 보란 듯이 성공하여 상대에게 복수하는 자강형,
버림받는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폭력으로 사랑을 차지하려는 폭압형,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생각하는 포기형으로 나눌 수 있다.
얼마 전 ‘생명의전화’라는 자살예방 단체에서 일을 본 적이 있었다.
‘생명의전화’로 걸려오는 전화가 의외로 많다는 것은 사회구조가 복잡해서일까?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빈도가 극히 낮았다.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즉 낭만적 테러리즘을 통해 복수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복수는 내가 살아있을 때만 가능하다.
나의 죽음을 보고 복수의 대상인 상대방이 뒤늦게 후회하며 울어줄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에 젖어 자살을 택하는 것은 결코 복수의 방법이 아니다.
복수는 상대의 모습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살아있어야 한다.
그 슬픔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2013.1.31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