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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창강_스테파노 2009. 12. 28. 23:38

 

 

흐르는 세월을 잡아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상하게 올 겨울은 많이 춥네요.
퇴임 송별회를 마치고 허전한 마음으로 거리를 걷다보니
어릴 적 썰매 타던 생각이 나더군요.
 
그랬지요.
녹다말다 얼어붙은 골목길은 조폭 얼굴에 그려진 칼자국 마냥
썰매자국이 푹 파여 있었죠.
그 길을 밀고 달릴 때는 썰매 송곳이 필요 없이 가랑이를 벌리고
기관사처럼 속도만 조절하면 되었지요.
왜 느닷없이 썰매 타던 생각이 나는지요.
정년이 가져다주는 허전함이 동심으로 돌려놓았는지도 모릅니다.
 
1년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제게 주신 회사를 사랑합니다.
실은 보직 없이 1년을 보낼 생각을 하니 비록 화백(화려한 백수)이라 좋다지만
갈 곳이 없는 화백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지요.
 
심감사 가 그러더군요.
‘보직을 떼는 기간이 1년이면 적당하냐구요’
불현 듯 받은 질문이라 이면에 감춰진 의미를 파악하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복잡한 거를 싫어하는 나는 있는 그대로 말했지요.
1년동안 안식년 주는 것이 적당하다구요.
하지만 1년 반이나 남았는데 퇴직 준비하라면 회사도 낭비이지요....
 
23일 날 정년퇴임 송별 오찬이 잡혀있다고 하더군요.
실은 정년퇴임식을 마다하였지요.
전 직원을 양지홀에 모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못할 짓이더라구요.
 
왜냐하면 아까운 시간을 빼앗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
우리 둘(곽영훈처장)은 모의를 하였지요.
직원들 동원하는 짓은 하지 말고 조용히 떠나자고...
그렇지 않던가요?
연극이 끝난 무대에 무거운 커튼이 내려오면 열정을 쏟던 연극배우가
커튼 뒤로 사라지듯 그러고 싶었거든요.
 
사실은 동생이 넷인데 우즈백에서 정년행사를 맞춰 귀국하고
금호에 있는 동생도 휴가를 내고 거기다 아들 딸 며느리가
축하한다며 부산을 떨더군요.
나는 속이 무겁고 기분이 울적한데 축하하다니요.
 
송별 만찬에 많은 후배들이 와주어 뒤늦게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이름은 새기지 않더라도 권처장님, 유형태팀장님, 유대성차장님,
조현숙과장...
김성택 부장께서 이름시조를 지어 낭송하는데 어찌나 고맙고 송구하던지요.
 
그날 제가 그랬지요?
세월의 강이 50대가 되니 너무 빨리 흘러가더라구요.
유행가 가사처럼 있을 때 잘 할 걸 잘한 게 하나도 없는 게 후회됩디다.
후배들에게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였지요.
 
‘아빠, 겁나 사랑해요’
집에 돌아오니 거실에는 수많은 풍선들이 오르다 말고 베란다 유리에는
정년을 축하하며 겁나 사랑한다는 글이 붙어있더군요
며느리 말처럼 두꺼운 소설책을 끝까지 읽기가 쉽지 않은데 존경한다나요?

이튿날 사장님과 경영진이 함께 송별 오찬을 했지요.
사실 전남지사장이 마지막 보직이었으니 현 경영진과는 가까이서
약주 한 잔 할 기회가 없어 딱딱하고 어색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그 자리에 가는 것도 부담스러웠지요.
더구나 격식을 차리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공식석상에 넥타이 매고
나서는 것조차도 꺼리는 성미이니까요.
 
역시 머플러를 걸치고 접견실로 들어갔더니 머플러를 풀라고 하더군요.
기념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그런다는데 그건 공감하지요.
내가 건너온 세월의 강을 반의 반도 못 지나 그 때의 얼굴을 그려보게 될테니까요.
 
“곽처장! 다음에는 이렇게 맛있는 거 사 줄 기회 없다”
송별 오찬을 하는 일식집에서 사장님이 말씀하시더군요.
그러고 보니 경영진과 식사를 해본 적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해요.
까짓 거 식사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건 아니구요.
 
그런데 내가 봐도 그렇고 식사가 점심으로는 양이 좀 많더군요.
사장님이 점심이 좀 무겁다는 말씀을 하시던데 가슴에 와 닿더라구요.
청년 해병대 장교가 부산 조직 폭력배와 결투를 벌이던 통쾌한 장면과
오버랩 시켜 보았지요.
 
검소함은 말에서가 아니라 몸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죠.
 
“우리 재밌게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을까?”
“우리는 일이 재밌는 일벌(꿀벌)이죠”
사장님의 말에 송전무님이 농반 진반으로 말씀하시더군요.
어쩌면 그리 정곡을 찔러 말을 하던지요.
저는 꿀벌의 생애를 에둘러 표현하며 분위기를 바꿔 나갔죠.
 
근데 노동조합에서 제일 큰 선물을 주더군요,
제 이니셜이 새겨진 만년필......
글쟁이는 만년필을 여러 개 놓고 이 것 저 것 번갈아가며
기분에 따라 쓰곤 하지요.
사장님이 굴(석화, 돌꽃 맞나요?)을 초장에 찍어 주인공인 우리와
노조위원장에게 먹여주는 소탈함에 드디어 맘이 확 열리더군요.
 
송별만찬, 송별오찬 감사드립니다.
한전 KDN 영원하길 빕니다.
사명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전력IT 전문기업으로 오래오래 남아있기를 기원합니다.
선후배 여러분!
혹시 근무하는 도중에 가슴에 돌을 얹었더라도 용서하십시오.
그동안 도와주심 기억하겠습니다.
 
경인년 호랑이처럼 힘차게 도약하는 한전KDN이 되길 기원합니다.
건강하십시오.
 
09.12.28 이주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