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안녕
지난 가을 압구정 골목의 리멤버라는 카페로 들어섰다.
분명 룸살롱은 아니고 그렇다고 카페도 아닌 그곳은 의외로 포근했다.
양주집은 거개가 제복을 입은 종업원이 입구에서 허리굽혀 어서옵쇼를 외치는데
카운터에 서있던 화장기 없는 생머리 여종업원이 와도 그만 가도 그만
가벼운 미소로 반기는 것이 오히려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간판이 말해주듯 누군가가 날 기억해주거나 아니면 내가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행복한 거래다.
맞은 편 테이블에는 나이 든 두 사람이 유자 빛 알전구 밑에서 머리를 맞대고
담소를 나누다가 그중 한 사람이 일어서 우리를 반긴다.
초저녁이라서 손님이 없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난 잘 모른다.
워낙 룸살롱나 양주집에 와본지가 오래되어 화류계 물정이 어둡다.
뒤따르는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벽에 걸린 액자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빼곡이 걸린 액자에는 알만한 가수들과 탤런트들의 서명이 주인과의 관계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다녀간 날짜와 함께 비틀거리고 있었다.
6.70년대 통기타 세대라면 알만한 그들이 이곳을 지나갔다니.....
“나애심씨는 작고하셨죠?”
액자의 사인을 보고 하는 말이다.
“아니요! 그 사람 오래 살겠네! ㅎㅎㅎ”
자리에 돌아온 늙은 주인이 소리 내어 웃는다.
우리가 이곳 압구정까지 흘러든 것은 ‘쟈니리’ 때문이다.
평소에도 2차를 들먹이면 아가리를 찢어 놓겠다며 싫어하는 성미건만
‘쟈니리’라는 말에 내가 먼저 바람을 잡고 나섰다.
사실 난 ‘뜨거운 안녕’이라는 노래는 알지만 그의 얼굴은 알지 못한다.
TV가 없던 시절의 가수이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하여튼 세월의 강을 건너기 너무 힘들어서인가?
벌써 7순이 지난 그 분과 잠시 포즈를 취하고 그간의 얘기를 나누니
덧없는 세월이 원망스럽다.
허망한 세월!
찬란한 조명발을 받으며 환희와 영광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와
마주 앉았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
(뒤편:가수정원, 왼쪽:쟈니리)
사람은 늙고 병들어 갈 길을 재촉해도 노래는 남는가?
인생 또한 떠나는 자를 보낼 때 뜨거운 이별을 하는 것이 아닐까?
빛바랜 청바지에 꽁지머리를 한 돋보기 너머의 노신사를 보니
내가 금방이라도 10년을 가불하여 살아버린 양 콧날이 시큰해진다.
“근데 저분은 누구세요?”
그와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던 친구(?)를 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정원이라는 가수란다.
“정원? 어떤 노래 불렀는데요?”
‘허무한마음’을 모르느냐며 일행이 일러준다.
아~ 맞다!
‘마른 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지난 가을 날 ~ ’
문득 잃어버렸던 소중한 물건을 찾아 헤매다 지쳐 포기하던 어느 날
뜬금없이 서랍장 속에 발견한 구슬처럼 반갑다.
“같이 오셔 얘기하면 안돼요?”
모두들 일차를 하고 왔건만 우리들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스스럼없이 다가온 가수 정원씨께 양주를 권하자 술을 못한다며 사양한다.
이 밤중에 캡 위에 선글라스를 걸치고 다가온 그는 쟈니리보다는 젊어보였다.
인생삼락이 무엇인가?
건강과 아무 때나 불러내면 나와 줄 친구와 행복한 가정을 갖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순배 술이 돌고 ‘허무한 마음’을 신청했다.
정원님은 사양하지 않고 앵콜송까지 세 곡을 부르고는 물을 한잔 마시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 옛날 밤무대라면 감히 노래 한곡을 청해 듣기가 어디 쉽겠는가?
친구가 술집을 하니 말벗을 찾아 손님 없는 시간에 말벗이 되고
손님이 붐비면 영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바람처럼 사라지는 우정!
‘찬 서리 기러기 울며 나는데 돌아온단 그 사람은 소식 없어 허무한 마음~’
가사가 귓속에서 뱅뱅 돈다.
10년 후의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할 것인가?
‘허무한인생’이 갑자기 흥을 삼켜버리고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주인인 쟈니리 선생이 마이크를 잡는다.
당신은 나이가 들어 숨차고 목도 많이 상해 노래하기가 쉽잖단다.
하지만 팬이 원하면 무얼 못하랴?
‘걱정마’와 ‘사노라면’을 연창하는 모습이 힘들어 보인다.
앵콜을 외치며 ‘그대 그리고 나’를 신청하자 사양하지 않고 부른다.
그 노래가 워낙 높낮이를 오가는 노래라 힘들게 고개를 넘듯 넘어갔다.
누군들 인생이 힘겹지 않은 시절이 없었겠느냐만 그 힘겨운 고개를
넘어가듯 간신히 힘겹게 넘어갔다.
주책없이 앵콜송을 신청했던 내가 미안해 손바닥에 불이 날만큼 박수를 치자
노신사가 어린애처럼 웃는다.
10년 후 내 모습은 이 두 분처럼 우정을 간직할 친구가 살아남아있을까?
방정맞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숙이자 눈에 이슬이 맺힌다.
두 분 건강을 기원합니다.
09.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