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졸업여행 편지

창강_스테파노 2009. 11. 16. 22:29

 

 

날이 추워집니다.

벌써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설악은 아마 하늘아래 제일

가까이 있어서인가 봐요.

 

졸업여행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붙이고 보니 왜 이리 허전한지요.

엄니랑 설악산 콘도에서 이틀 밤을 자고 동해안 도로를 타고 내려오다가

부서지는 하얀 파도가 어찌나 스산하던지 삼척도 못가서 그만 돌아왔지요.

 

여행은 항상 설렘과 강렬한 호기심으로 가슴이 뛰는데 이번에는

전혀 그렇지 않더군요

낯선 외국이라면 호기심 만땅으로 이 곳 저 곳 셔터 누르느라 정신없었을 텐데

밋밋한 감정은 아마 자주 왔던 곳이라는 선입감 때문이겠지요.

그래도 미시령이 가까워 오자 마치 유럽 어디쯤 와있는 기분이 들기는 하더군요.

 

졸업?

단어가 던지는 의미가 참 여러 가지로 다가오네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정든 학교를 떠나는 어릴 적 그 순수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어 마치 영원히

못 볼 사람들처럼 헤어짐에 대한 눈물이 연상되는가 하면

내가 붙인 졸업여행이라는 단어는 인생의 졸업 같은 느끼마져 들더라구요.

 

처음에는 별 생각 없었던 졸업여행이라는 단어가 여행 내내 운전을 하며

이리저리 생각해보니 정말 사랑방에서 곰방대를 뻑뻑 빨아대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인가 싶어지더이다.

 

이번 졸업여행을 떠나기 전 날 설악산의 각 령(嶺)은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니

눈 꽃 세상으로의 여행이 얼마나 신이 나던지요.

하지만 강원도에 다가갈 즈음 멀리 보이는 높은 산들이 머리에 눈을 이고 있었지만

이미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많이 녹아버렸더군요.

미시령 옛 고개를 넘으려 하니 진입금지라는 팻말이 눈을 부릅뜨고

어서 되돌아가라고 손짓을 하더군요.

 

여행은 뭐니 뭐니해도 밤이 제일 즐겁지요.

콘도에서 엄니랑 얘기하며 막걸리 한 병 마시는 그 맛이야 누가 뺏어갈까

눈을 힐끔거릴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으니까요..

이튿날도 내내 가는 비가 오락가락 뼛속까지 추위를 몰고 와

영랑호를 한 바퀴 돌고 오색온천에서 몸을 담그고 돌아오니 하루 일정이

훌렁 지나가버렸지요.

 

여행을 하면서도 여자들은 두고 온 집 생각에 맘이 편치 않고 남자들은

일을 털어버리지 못해 얼핏 설핏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지요.

천성이 낙천적이 못되어 그러려니 하지만 항상 일을 머리에 담고 있으니

아마 일 중독에 걸린 것은 아닌가 모르겠어요....

 

2박은 따지고 보면 오가는 날 빼고 보면 만 하루뿐인 시간이지요.

둘째 밤을 자고 나서 아침먹자마자 퇴실해야 하니 2박 1일 여행인 셈이지요.

이제 내년이면 팔순잔치를 받으실 엄니와의 졸업여행이 혹시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하면 겹으로 인생이 덧없어지기도 하더라구요.

서울로 들르지 않고 곧바로 광주로 내려가시겠다는 엄니의 말이

아직도 가슴에 걸립니다.

 

아내가 하룻밤 더 자고 가자는 말을 꺼낼 때 그러고도 싶었지만

하룻밤 더 잔들 기분이 나아질 거 같지도 않고 밀린 일이 어른거려

못들은 척 앞만 보고 강릉 시외버스터미널로 차를 몰았습니다.

마치 고려장 생각이 나서 엄니의 표정을 훔쳐보니 나만 좋다고 하면

하루 더 머물 생각이더군요.

시골 성당 오픈행사가 있어 꼭 가야된다고 하시면서도......

 

 

그래도 엄니가 건강하시고 바쁘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지요.

엄니를 시외버스에 태워드리고 우리 두 내외가 손을 흔들며 바라보니

기어코 엄니의 입이 ‘ㅅ’자로 변하며 결국 눈물을 보이고 말더군요.

원래 눈물이 많으신 엄니라 그러려니 했는데 이번 눈물은 유독 가슴에 맺힌

이유를 모르겠어요.

 

동해안을 따라 두루두루 유람삼아 부산을 거쳐 광주로 갈 걸 그리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네요.

졸업여행은 또 있는 것도 아니고 내년에도 엄니랑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다 자기 편리할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가 봅니다.

 

엄니!

낼 부터는 날이 영하 5도로 떨어진다는 데 석유 아끼지 말고 방 따뜻하게

하고 주무세요.

09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