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썰매 만들던 날
“성아! 썰매 만들어줘!”
대나무를 쪼개어 외발로 타는 스키는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눈 위에서만 타야하는데 하루만 지나도 눈이 녹아 얼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마당가에 쌓아놓은 생솔가지들이 머리에 눈을 이고 떨고 있습니다.
허청(1) 양지바른 곳에 앉아 사촌형과 썰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형이 허청 시렁에서 제법 두꺼운 판자 조각을 내려옵니다.
하지만 썰매 날을 붙일 판자를 잘라 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톱만 있으면 금방 자를 수 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형이 식칼로 골을 파고는 발로 힘껏 부러뜨려 판자를 자릅니다.
나무 결에 따라 삐죽삐죽 불규칙하게 잘린 판자를 깎아내는 것은 내 몫입니다.
썰매 깔판은 얇은 사과상자를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근데 썰매 날을 댈 철사가 문제 입니다.
학교 유리창 틀에 깔린 철사가 최고로 좋습니다만 그런 철사는 있을 리가 없습니다.
형이 뒤란으로 돌아가더니 굵은 철사를 가지고 나옵니다.
아마 썰매를 만들기 위해 진즉부터 준비해둔 모양입니다.
철사를 돌담 틈새에 집어넣고 구부려 판자에 걸치니 그럴듯한 썰매 날이 만들어집니다.
형의 손이 조각가 손처럼 재치 있게 움직입니다.
이제는 깔판을 붙이면 썰매가 완성 됩니다.
“성아! 나도 한번 해볼께!”
왼손으로 못이 넘어지지 않도록 잡고 망치로 못을 박기 시작했습니다.
“아얏!”
여지없이 엄지손가락을 두들기고 만 것입니다.
눈물이 핑 돌아 손가락을 움켜쥐고 입으로 불고 있으니 튕겨져 나간 못이 옆으로 누워
약을 올립니다.
마당가에 쌓아놓은 생솔가지 중에서 퉁퉁한 가지를 골라 송곳 자루를 만들고
형은 투닥투닥 못을 박아 썰매를 만들어 놓고 보니 그럴 듯합니다.
송곳 침으로 쓸 못대가리를 산돌(2)위에 놓고 망치로 짓이겨 뭉툭하게 만들었습니다.
형은 그 못을 군불을 지피고 있는 행랑방 아궁이에 집어넣었습니다.
달궈진 못을 꺼내 소나무 줄기에 끼우니 송진 냄새가 향긋하게 허청을 돌아나갑니다.
얼른 구정물에 담가 못을 식히니 단단한 송곳이 되었습니다.
형과 나는 물이 가두어진 논으로 갔습니다.
백구 녀석도 우리를 따라옵니다.
땡땡 언 논에는 벼 포기가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형이 한번 타보더니 나에게 썰매를 건네줍니다.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송곳을 박아 밀어대니 스르르 미끄러져갑니다.
벼 포기를 요리 조리 피해 얼음을 지치니 그 오묘한 재미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형은 논두렁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 말고 혼자 돌아가자 백구 녀석도 힐끔거리며
나를 보더니 형을 따라 돌아갑니다.
동네 애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썰매를 타니 논바닥이 운동장처럼 시끄럽습니다.
동네 형들이 내 썰매를 보더니 한번 타보자며 인상을 씁니다.
우리 동네가 아니라 조금 겁이 나기도 합니다만 여차하면 사촌 형한테 일러줄 참으로
들은 척도 않고 썰매를 타자 낯선 형들이 내 썰매를 부딪히며 지나갑니다.
꽁꽁 언 손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아픕니다.
누군가 논둑에 불을 붙였습니다.
나는 얼른 썰매를 송곳으로 찍어 어깨에 메고 불 옆으로 다가가 언 손을 쪼이며
젖은 양말을 불 위에 올리니 발바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옵니다.
썰매 타는 것도 재미있지만 불놀이가 더 재미있습니다.
“야! 너 불 쬐지마!”
썰매를 안 빌려 준 것에 속이 뒤틀리는 모양입니다.
얼른 마른 잔디를 뜯어와 불씨를 만들어 다른 논둑에 붙이자 논둑에서 불이 춤을 춥니다.
이제 이 불은 내 불입니다.
가만히 마른 소똥을 집어 불씨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온몸이 따뜻해져 옵니다.
멀리 동구 밖에서 아짐(3)이 식사하라며 손짓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배가 엄청 고파 옵니다.
1) 허청 : 헛간, 안채와는 별도로 측간이 함께 붙은 별채
2) 산돌 : 맷돌을 만드는 데 쓰는, 푸르스름한 회색을 띤 돌로 부스러지지 않고 단단함
3) 아짐 : 아주머니의 전라도 방언(흔히 형수나 먼 친척을 일컬음)
** 썰매는 두꺼운 송판에 철사를 대어 만든다. 하지만 철사가 귀한 그때에는 학교 유리창틀에 박힌 철사를 몰래 뜯어내어 만든 것이 최고로 인기였다. 얕은 개울이나 논에서 썰매를 타기도 눈이 녹아 땡땡 언 골목길에서 타는 재미가 쏠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