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그림자 놀이
겨울밤이 깊어갑니다.
등잔불 앞에 밥상을 놓고 무릎 꿇고 앉으니 등잔불이 춤을 춥니다.
방바닥은 뜨거운데 등허리로 우풍(1)이 째려보며 스쳐갑니다.
동생이 내 옆으로 다가와 등잔불을 건드리자 콧바람에 또 한번 춤을 춥니다.
“불장난 허지 마라!”
나락 매상을 하고 조합에서 받아온 돈을 세는 아버지가 여느 때 같으면 찰싹
넓덕지(2)를 때렸을 텐데 오늘은 관대 하십니다.
근데 아버지는 셈이 안 맞는지 계속 돈을 세고 계십니다..
“아따! 먼 돈을 밤새도록 세고 있소?”
무릎이 닳아 구멍이 난 내복을 꿰매고 계시던 어머니가 한 말씀 하십니다.
하도 부잡하게 놀아대니 옷이 성할 리가 없습니다.
어머니 손톱에서는 배가 불룩한 이가 툭툭 터지는 소리가 납니다.
“성! 맴생이(3) 만들어봐!”
그렇잖아도 공부하기가 싫어 하품을 하던 참입니다.
아버지 눈치를 보며 그림자놀이가 그려진 방학책을 꺼냈습니다.
책 속에 그림자놀이가 들어있으니 공부하는 것이나 매 한가지입니다.
동생이 방학책 속에 그려진 손 모양을 따라 흉내를 냅니다만 염소 같지가 않습니다.
내가 두 손바닥을 마주 끼고 염소를 만들어 벽에 비추어 새끼손가락을 움직이니
까만 그림자가 정말 염소처럼 입을 오물거립니다.
벽에 착 달라붙은 달력 속에 활짝 웃고 있는 사람을 물기도 하고 시렁에 매달린
메주 그림자를 먹기도 하였습니다.
“아부지! 고양이 그림자 갈켜주세요!”
아버지가 돈 세는 것을 멈추고 방학책을 들여다보시더니 손을 비틀어
어려운 고양이를 만드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못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피이잉! 피이잉!’
어느새 꿈나라로 들어간 동생의 숨소리가 겨울밤에 묻혀 갑니다.
콧구멍에 가득 찬 코딱지를 파내면 소리가 안날 텐데 내가 답답합니다.
동생이 자는 모습을 보니 내 눈꺼풀도 저절로 내려앉습니다.
“치지직!”
깜짝 놀라 졸음에서 깨어보니 등잔불에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방안으로 퍼집니다.
밖에서는 가랑잎들이 달리기를 하는지 문풍지가 신음을 합니다.
아버지께서 일어나 시렁위에 올려진 이불을 내리시더니 동생을 덮어 줍니다.
시렁은 너무 높아 우리는 손이 닿지 않습니다.
까치발을 해보아야 기껏 메주 밑동이 닿을까 말까 합니다.
이불을 내리면 자도 좋다는 신호입니다.
깜장바탕에 하얀 테를 두른 무거운 솜이불이 밥상을 밀어 올립니다.
사실 진즉부터 자고 싶었지만 억지로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불을 펴 놓으니 금새 잠이 달아나고 눈이 말똥말똥 해집니다.
이상하게 공부하면 잠이 오고 자려고하면 잠이 안 옵니다.
어머니가 윗방 문을 열자 휘익 찬바람이 몰려들어 옵니다.
윗방에는 수숫대를 엮어 세워 놓은 둥그런 발에 고구마가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곳에는 서생원도 함께 살고 있어 고구마를 갉아 먹는 건 보통입니다.
어떤 때는 서생원들이 숨바꼭질을 하는지 우르르 달리다가 찍찍대며 싸우기도 합니다.
고구마를 골라 바가지에 들고 오시는 어머니를 뒤따라 찬바람도 같이 들어옵니다.
살짝 언 차가운 고구마가 어머니 손에서 옷을 벗기 시작합니다.
침을 꼴깍 삼키며 어머니 손끝을 바라보니 어머니 손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고구마를 먹다말고 창살문 쪽 유리로 마당을 보니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1) 우풍 : 외풍의 전라도 방언
2) 넓덕지 : 엉덩이의 전라도 사투리
3)
맴생이 : 염소의 전라도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