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전이란게...
518 묘역 지킴이를 따라 깊어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분향대로 향했다.
의장대의 화환을 뒤따라 걷던 정치인들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떠오른다.
하지만 잠든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는 마음보다 의전에 신경이 쓰인다.
그러고 보면 과거보다는 현재를 더 중시하는 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리라.
묵념을 올리자 잔잔한 추모음악이 산을 넘어 북쪽으로 흘러간다.
그제야 25년 전의 금남로가 떠오르고 가슴 저편에서
그날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곁에 선 손님들은 서글픈 이 추모곡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할까?
함성이 울려 퍼지던 그 날 꽃잎처럼 스러져간 젊은이들의
비통한 심정을 알까?
來光한 손님들을 518묘역으로 안내하는 것이 혹시나
강요하는 것으로 비추이지는 않을까?
여유시간을 묻는 지킴이에게 현실로 돌아온 나는 5분밖에 없다며
잘라 말했다.
동선(動線,이동계획)을 어떻게 잡을까?
의전을 중시하는 손님맞이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게 한다.
단순한 사무실 방문이 아닌 이 곳 저 곳으로 장소를 바꾸는 의전은
여러 가지 예외 상황을 고려하여 치밀한 계획을 세워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분 단위 까지 맞춰 이동 스케줄을 맞추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인생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한 장의 일정표에 따라
종점을 향해 걸어가는 여행이다.
70 아니면 80이라는 종착점에 마디 선을 그어놓고 다시 매 1년마다의
계획과 하루의 계획을 세분하여 그 계획에 따라 살아가는 여행이다.
그 일정대로 차질 없이 나아가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겠거니와
그렇지 못할 경우 계획 자체를 수정해 새로운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살다보면 일정표대로 되는 일이 없듯 의전 또한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09:35 공항 도착 그리고 11:40까지 행사장 도착......
2시간이란 여유시간을 어떻게 하면 가장 유익하고 인상에 남도록 할까?
자투리 시간을 알차게 꾸미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무실에서 딱딱하게 현황 브리핑하는 것 또한 시간이 남는다.
518묘역에 참배하고 담양 소쇄원에서 초가을 고즈넉한 정원을 둘러본 후
무등산을 가로 넘어 행사장으로 향하는 빠듯한 일정을 잡았다.
인사권을 쥔 상사를 모신다는 것이 기회일 수도 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2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할 것인가.
좁은 차안에서 숨을 죽이며 서먹하게 동행하는 것은
2시간이 2년만큼 긴 시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먹한 만남을 편안한 분위기로 이끌어 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상사가 스스로 분위기를 편하게 가져가는 방법이고
또 한 가지는 부하가 탁월한 언변술로 분위기를 녹여가는 방법이다.
대부분 첫 번째 방법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두 번째 방법이 최고의
대안일 것이나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분향을 마치고 소쇄원으로 차를 돌려 비켜가는 햇살과 벗하니
물든 단풍이 처연하다,
굵은 대나무가 죽죽 뻗은 대숲 너머에 몸을 감춘 제월당과 광풍각이
주인 잃은 텅 빈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사진작가들이 소쇄원의 풍광을 담고자 여기저기에 삼각대를 세우고 있다.
500여년 전 그러니까 컬럼부스가 미국을 발견한지 얼마 안 되던 그때
선비 양산보가 조광조의 죽음을 한탄하며 한숨짓던 그 자리에 서서
나도 가슴을 열고 마음을 비워보았다.
하지만 내가 가슴이 비워지지 않은 것은 곁에 모신 상사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마포바지 방귀 빠져 나가듯이 휘이 둘러보고 되돌아 나와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읊조렸던 식영정을 차창으로 바라보며
무등산 허리로 올라탔다.
이뿔싸! 시간이 30여분 밖에 남지 않았다.
기차시간 다 되어 가는데 용돈 줄듯 말듯 딴청 부리는 계모처럼
앞에는 봉고차 두 대가 깊어가는 가을을 희롱하며 유유자적이다.
하얗게 핀 억새는 이제 막 솜털을 날리기 위해 찬바람을 그리워하고 있다.
아무래도 시간이 빠듯할 듯 싶어 추월하고 싶으나 뱀 허리 틀 듯
구부러진 길은 추월을 용납하지 않는다.
산천경계 유람하며 가을을 탐하는 그들이 곧 신선이다.
이미 약속시간이 지나 5분이 초과하고 있었다.
지각하여 교실에 들어섰을 때 쏟아지는 시선을 주체하지 못하고
분위기 파악하는라 몸 둘 바를 모르던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아직 대통령이 도착하지 않았지만 오찬장에 뒤늦게 들어가
따가운 시선을 받을 생각에 가슴이 벌렁거린다.
재촉하지 않고 느긋이 기다려주는 당신의 여유에 오히려 미안하다.
이번 광주전남 혁신도시 기공식에서 호남의 훈훈한 인심과 풍광을
가슴에 담았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돈 들지 않은 가을의 햇살 한 줌이라도 담아갔는지 모르겠다.
不接賓客 去 後悔!
가난한 손님은 못 본 체하고 부자손님에게는 맘에도 없는 환심을
사려고 발버둥친 건 아니었을까? 07.11